우리의 이웃 동남아 - 김상남 교수
우리의 이웃 동남아(대만-태국-싱가폴-말레이시아-홍콩-마카오)
지난 1991년 7월 2일부터 12일까지 10박 11일 동안 대만, 태국, 싱가폴, 말레이시아, 홍콩, 마카오를 학교의 도움으로 인천전문대학 동남아 교수 연수단 20명중의 한사람으로 다녀온 소감을 적어보기로 한다.
<첫 번째> 방문국은 김포공항을 이륙한지 약 2시간만에 도착한 담배 잎 모양을 타이완 섬과 팽호 열도 등 크고 작은 79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고 경상남북도 만큼의 땅에 약 2,000만 명이 살고있는 "대만"으로 중국 대륙의 축소판이라고들 한다.
우리 일행은 ‘중정’국제공항에서 고속버스 편으로 타이베이 시로 이동하는데 특이한 사항은 고속도로 매표소의 안내인들이 여성들이며 하나 같이 장갑을 끼었으며, 그 장갑은 끝을 끊어낸 장갑이었고, 이유는 남성기사들이 자꾸 손을 잡으려 한다고 해서 그렇다고 한다.
타이베이 시 입구의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장개석(중정)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가 경영한다는 ‘원산 대반점’(Grand Hotel), 신해혁명과 대일 항쟁에서 전사한 20여 만 명의 영령을 모신 ‘충렬사’, 고 장개석 총통을 기념하기 위한 높이 70 m 23층 빌딩에 상당하는 대만 최대의 순 중국식 건축물인 ‘중정기념당’, 타이베이 발상지라는 많은 잡신을 집합시킨 ‘용산사’, 고산족들의 거주지 ‘우라이(鳥來)’ 민속촌 중국 오천 년의 역사, 문화예술의 전당으로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밀려나면서 옮겨온 문화재 62만점이 1만 2천 점 씩 3~6개월마다 바뀌어 전시된다는 국립 ‘고궁박물관’ 등을 관광하였다. 거리의 간판은 한문이고 거리 이름도 우리 나라와 같이 종로, 을지로와 같이 되어있어 이국적인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고, 대부분이 영어를 쓰지 않아 대화는 어려웠으나 표정이나 뜻이 통하는 느낌을 주었다.
수퍼마켓을 물어도 통하지 않아 직접 간판을 보고 찾아갔으나 영어가 통하지 않아 일행중 한 사림이 메모지에 대죽(竹)를 써서 주었더니 죽엽청주(竹葉淸酒)를 가지고 나왔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필담(筆談)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만만디"라고 할 수 있는 듯 하다. 건물들은 도색(塗色)하면 무얼 하나 또 지저분 할텐데 하는 생각에서인지 페인팅을 하지 않고 간판도 한번 붙치면 그만이다. 거리의 차량, 오토바이, 횡단 보도 등은 무질서하기 짝이 없으나 도로상에서 다투는 행위나 경적소리는 볼 수 없고 약간의 접촉사고가 있다 하더
라도 그냥 지나친다 한다. 우리의 "빨리 빨리"와는 대조적인 인상이다.
단체 관광 스케줄이 끝난 저녁 늦은 시간에 일행중의 기독교수 네 사람이 택시를 한국인 이희숙 선교사와 대만인 임국양 목사님 부부가 운영하신 국제종교신학원(신학교)과 낡은 건물에 같이 있는 가락산 교회를 방문하였다. 타이베이시의 남서쪽 위성 도시인 대판시 대관로에 있어서 50 여분 달려서 묻고 물었지만 영어로는 통화가 되질 않아 한문의 필담과 지도와 건물벽의 표지판을 보고 찾아갔다. 학생 10 여명이 초라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한국교회에 도움을 받고 한국교회 부흥집회 인도 차 자주 내한(來韓) 하신다고 하셨고, 대만 동부 관광도시 ‘화련’에 대지를 마련하고 신학교 건축인가를 약속을 받았으나 건축 설계비 때문에 기도중이라고 하셨는데 우리 일행 중 건축설계 전문가가 설계를 하여 주시기를 약속하는 기도 응답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전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도구로 쓰심을 알게 하여 주심에 또 다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두 번째> 방문국은 ‘물과 대평원’으로 이루어진 ‘온화한 미소’의 나라 "태국(泰國)"이었다.항공기 스케줄이 한차례 결항되어 대만에서 홍콩 경유하는 대, 홍콩공항에서 네 시간을 기다려 늦은 밤에 방콕의 ‘돈무앙’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유럽스타일 우측 통행하는 고속버스 편으로 4시간을 달려 태국 남서부 휴양도시 ‘파타야’를 지나 해안도시 ‘반폐’라는 지역의 ‘남사이 리조트호텔’에 짐을 풀었다. 한적한 휴양단지에 커다란 야외 수영장을 갖추었고 호텔 내부도 깨끗하고 넓었으며 특급호텔이었고, 우리일행은 수영장에서 수영도 즐기고, 테라스에서 휴식도 취하였다. 다음날 가이드는 ‘파타야’는 우리나라 해운대와 같아 오염이 많이 되어있으므로 동해안이나 제주도와 같은 ‘코사멧’으로 가기로 했다. ‘반폐’에서 유람선편으로 ‘코사멧’ 섬에 도착하여 남국의 해수욕과 태국음식을 맛보았다. 야자수 열매와 산호에서 나온 하얀 모래와 맑은 하늘은 열대지방의 낭만을 즐길 만 하였으나 더위는 피할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선박을 대여하여 바다 스포츠를 즐겼는데 인근에는 유럽쪽에서 온 백인 노인들이 수영을 즐기는 모습도 보았다.
밤늦게 청빈으로 유명한 ‘잠롱’ 시장의 ‘방콕’으로 돌아와 시암시티(Siam city)호텔에 여장을 풀었으며, 이 호텔도 시설이 좋았다.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주의를 들으며 새벽사원, 에메랄드사원을 관람하였고, 다음은 왕궁에 왔으며, 왕궁은 전속 태국인 가이드 아가씨가 서툴은 한국말로 안내하였다. 다음은 ‘차오프라야’강줄기에서 물위에 집을 짓고 생활하고 장사도하는 ‘수상시장’ 등을 돌아보고 저녁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기네스북에 기록 되어있다는 3000명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툼낙타이’ 식당에서 태국식으로 했는데 이 식당은 종업원들이 롤라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며 음식을 나르는 것이 특이했다.
태국은 역사상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로 자존심이 대단하며 불교의 나라로 남자는 일생에 3개월 정도를 불문에 들어가는 정도라 하며, 거리의 차량들은 정원의 제한이나 폐차규정이 없어서 콩나물 버스, 택시들과 2차 대전 때의 차량들이 가끔 눈에 띠며 차의 외함 즉 케이스만 진열해 놓은 상점들도 보였고 한인교회를 찾아보려 했으나 방콕에는 알 수가 없고 북부 제2의 도시 ‘치앙마이’에 있다는 말만 듣고 3박 4일의 태국일정을 마쳤다.
<세 번째> 방문국은 인구 200만 명의 도시국가 "사자의 도시"라 불리 우는 "싱가포르"로 향했다. 비행기의 좌석번호가 62A로 창가가 되어서 방콕에서 말레이반도를 따라 내려감으로 푸른 열대의 삼림을 보면서 눈을 떼지 않았고 하나님은 공평하시구나 생각하며 창이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싱가포르의 역사전시관과 휴양시설을 인공적으로 만든 센토사 섬을 유람선과 모노레일, 케이블카로 돌아보고 아름다운 새들의 낙원이고 새들의 묘기인 ‘새쑈’를 관람하는 주롱버드 공원, 열대식물의 진열장 국립식물원과 동양의 쇼핑의 1번지라는 ‘오챠드’로드 등을 관광하였다.
싱가포르는 우리 나라와 가장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싱가포르 가이드 책자가 한글판으로, 한국의 건설회사가 지었다는 창이 국제공항청사와 빌딩들, 거리에 가끔 보이는 자랑스런 한국의 차량들, 한국에서 나가있는 은행들이 있었고 구멍가게에서도 한국산 제품들이 많이 있어서 어깨에 힘을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특이한 것은 모든 법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무거운 벌금이 부가됨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즉 "금연구역" "$ 5000", "휴지를 버리지 맙시다" "$ 1000" 표지판에 나란히 적혀있으므로 구호로만 외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신경을 쓰느라 위축된다 고들 했다. 거리나 공공장소 모두들 깨끗하다 상하의 나라이고 비도 자주 내려 먼지도 낙엽도 없어 지구상에 가장 깨끗한 나라라는 것을 느꼈다
<네 번째> 방문국은 자원이 풍부한 ‘황금반도’라 하는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 수방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여행 기간 내내 ‘캐세이 퍼시픽’ 항공기를 이용하였지만 싱가폴 ‘창이’공항에서 말레이시아 ‘수방’공항까지는 말레이항공을 이용하였다. 콸라룸푸르에서는 ‘바로셀로나’ 올림픽 축구예선전이 이틀 전에 끝난 ‘메르데카’ 스타디움, 이슬람사원, 왕궁, 독립 전적비, 국립박물관, 전통가옥, 원숭이의 천국 ‘바투’동굴, 차이나타운 등을 둘러보았고, 둘 째날 저녁에는 교민 댁에서 가정 식으로 한식을 대접받았는데 그 가정은 말레이시아 한인교회 집사님 댁으로 현관에 들어서니 성화, 교회달력, 성경, 찬송가가 있었고 식사 중 수요예배를 말씀드렸고 식사 후 그 가정 식구들과 같이 자란 ‘임비’에 위치한 말레이시아 한인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렸다.
담임인 노종해 목사님은 세계선교대회 참석 차 싱가포르에 가셨고 조영덕 전도사님의 "위기 앞에선 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고 여행 중 성전에서의 예배인 터라 우리 일행은 참으로 은혜스러웠으며 회교국 말레이시아에서의 예배이므로 더욱 감사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을 만큼 이슬람교도들의 생활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하루 다섯 번씩 이슬람 발생지 ‘메카’를 향해 기도를 드린다. 호텔이나 공공장소 어디에나 메카를 향한 화살표시가 천정에 붙어있으며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무릎 꿇고 기도할 자리와 메카의 방향을 찾을 나침판을 항상 지니고 다닌다고 한다. 우리교회와 인연이 깊은 아쟁목사님의 선교지 동 말레이시아 사라왁은 너무나 멀고 일정도 없어서 섭섭한 마음으로 CX 720 편에 몸을 싣고 우리의 일행은 말레이시아를 떠났다.
동남아 6개국 중 가장 안정되고, 2020운동(2020년에는 선진국대열로 들어가자는 국가적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있고, 자원도 풍부하고, 땅도 비옥하며, 치안상태도 좋아 보이는 나라로 기억된다.
<다섯 번째> 방문국 홍콩은 도시국가이며 중계무역국가이고 몇 년 후면 중공에 반환될 영연방 국가이다. 적도에 가까운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보다 체감온도가 높아 관광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홍콩 섬의 해양공원, 해수욕장이 있는 ‘리펄스 베이’를 관광하고 다음날 400여 년 동안 포르투칼 식민지 이어온 <‘마카오’>를 페리호 편으로 건너가 중국의 오성기와 포르투칼 국기가 가까이 휘날리는 국경에서 해외의 화교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을 보며 우리의 판문점과 비교해 보았고 김대건 신부가 수학했다는 성 폴 천주교 유적지도 보았고 가끔 영화에서나 보았던 도박장도 둘러보고 홍콩을 거쳐 서울행 항공기에 열 하루의 나그네들은 몸을 실었다.
축복 받은 땅, 은혜의 땅으로 향하는 CX 420편에 오르는 순간 서울에 다 왔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들이었다. 해외에서 태극기를 보면 누구나 애국자기 된다는 말을 실감했고 해외에서 만난 교포들은 고국의 정치, 경제, 학생운동 등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으며 88 서울올림픽이 타국에서의 교포들 지위를 올렸고 고국의 발전을 하루하루 느낀다고들 하였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타 국민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나 언어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갈 때 걱정했던 언어는 같은 동양권이어서 인지 필담이나 단어만으로 어느 정도 통했고 우리의 여행객들이 많아서 인지 그들이 우리말을 조금씩은 알고 있었으며 음식은 국력이 신장되어서 인지 어느 나라에서나 한국음식점이 있었으나 방문국의 음식을 맛보는 의미에서 그 나라 음식을 취했다. 짧은 기간에 여러 나라를 방문하다 보니 주로 대도시인 수도를 중심으로 보았으므로 각 나라의 전체 국민 생활을 접해보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해외 첫 나들이한 사람이 글을 싣게되어 여행 선배 여러분께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열 하루의 여행에서 본 것들을 좁은 지면에 옮기다 보니 누락된 것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여행기간 기도로 도와주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더운 날씨 20여 시간의 항공기에서도 함께 하시고 일행 중 기독 동역자들을 동행하게 하신 임마누엘 하나님께 더욱 감사를 드린다.
1991년 7월 김상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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