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베트남 전체교수 연수기(2006.06.16-20)

ksn7332 2006. 6. 21. 22:59

 

베트남 전체교수 연수기(2006.6.16-6.20)

 

 

<<<자세한 사진은 Photo방 "교수연수(06.06)베트남"에 올렸습니다>>

 

 

 2006년 6월 16일(금)부터 6월 20일(화)까지 3박 5일 동안 “2006인천전문대학 전체교수 연수“프로그램으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하롱베이등의 변방을 방문하고 다녀온 기행을 적어보기로 한다.

 

 

 

 

  6월 16일 오전 7시30분에 학교에서 학교버스편으로 8시 30분에 인천국제공항 3층 j카운터에 모여서 여행사 측에서 나온 도움이에 의해 항공권을 받고 짐을 붙친 다음 보안카운터를 통과 출국심사를 받고 면세점을 거쳐서 10시 40분 베트남항공(VN937)편으로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비행기는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목포 부근에서 기수를 서남쪽으로 돌려 상해를 거쳐 중국대륙을 관통하여 약 4시간 30분의 비행시간 후인 15시 15분(현지시간 13시 15분)에 하노이의"노이바이공항"에 도착하였다.

  항공기내에서의 스튜어디어스는 한국인과 베트남 여승무원이 함께 근무하고 있어서 언어의 문제나 기내식의 문제도 없었고, 음료수 서비스 후 기내식이 있었고, 비행도중 영화상영도 있었으며 좌석이 42A로 창가에 있었으므로 계속 밖을 내려다 보면서 외부의 창밖을 주시하면서 사진도 찍으면서 낮 비행이므로 지루하지 않게 비행을 하였다.

  노이바이(노이는 하노이를, 바이는 비행기를 뜻하는 말로 하노이 비행기란 뜻)공항은 우리나라의 제주공항과 규모와 구조가 비슷한것 같았고 붐비지 않아 입국수속도 간단히 끝내고 80여명의 일행은 버스 3대에 분승하여 정인관광 1호차에 탑승하였다.

 

  베트남에 10여년전에 태권도 사범으로 와서 베트남 여인과 결혼하여 6세 딸이 있다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이드 김인하 부장은 베트남을 소개 한다. 

   "베트남의 면적은 33만 평방 킬로미터로 한반도 22만 평방 킬로미터의 1.5배로 인구는  약 8300만 명인데 등록되지 않은 인구를 감안하면 약 1억명으로 추산하며, 한국 교민은 약 3,500명으로 호치민시(사이공)과 하노이에 주로 거주하며, 수도는 이곳 하노이지만 경제중심지는 호치민이며, 시차는 한국보다 2시간 늦고, 해안선의 길이가 약 2,600[Km]로 서울과 하노이간 3,800[km]와 견줄만한 호치민과 하노이의 교통은 비행기로 3시간 기차로 약 38시간이 소요되며, 언어는 옛날에는 중국어(한자)를 썼으나 프랑스 통치시절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한자를 라틴어 형식으로 한 베트남어로 6성조로 이루어 졌으며, 남녀 평등의식으로 여자가 생활력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며, 기후는 북부(하노이)아열대성 기후로 겨울철에는 10도 내외 여름철에는 38도 가량인데 43도가량 올라가는 때도 있는데 오늘은 37도 란다.

  한국과의 관계는 베트남 전때 자유월남을 지원하여 32만명이 참전하여 5,007명이 전사하였고, 75년에 자유월남과 미군의 패망으로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어 1992년에 한국과 수교하였으며, 전쟁시 일부 건설기술자와 파병 군인에 의한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부모로 태어난 소위 "라이따이한"이 많이 있으나 파악이 되질 앟고 있으며, 일부 남부지방의 특정한 베트남인(전쟁때 가족을 잃은 주민)은 좋지 않은 감정이 일부는 있지만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방은 거의 없고, 전후에 베이비 붐이 일어나 전후 세대가 60%이상인 노동력과 잠재력이 있는 나라로 한국인의 기업및 기술을 손짓하는 나라라 한다

  베트남은 국가 발전을 위하여 도이모이(도이:바꾸다, 모이:새롭게)정책을 써서 국가발전을 위하여 국민희생 정책(임금동결)을 쓰고 있어서 일반 노동자의 임금은 우리 화폐로 월 4-5만원이며, 먹는 것은 저렴하며, 2모작, 남부에는 3모작으로 양식이 풍부하여 식당에서 추가 공기밥은 공짜이며, 은행이 기끔 파산하므로 은행을 못 믿어 가구마다 금고를 지니고 돈을 보관한다고 한다."    

 

공항을 빠져나와 20여 킬로미터의 하노이 시내에서 간단한 베트남 쌀국수로 간식을 하고

부흥의 검(레러이 검)이라는 뜻을 지닌 호암키엔 호수를 버스편으로 한바퀴 돈 다음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공자의 뜻을 기리는 공자의 사당 "문묘"를 관람하고 대우호텔에 간단히 여장을 푼 후 하노이 시내의 "수중인형극"을 관람하였다.

  수중인형극은 한편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발을 쳐놓은 뒷편에서는 여러가지 줄과 막대기로 인형을 조종하여 배트남의 민속 및 농업등을 풍자한 내용을 연출하였으며, 관광객 대부분은 한국인들이었고 날씨기 37도 가량의 무더운 관계로 여기 저기에 선풍기도 달려 있었다.

  수중 인형극을 관람 후 시내의 한국음식점인 "대장금"에서 저녁식사 중 베트남의 자매결연대학인 홍방대학의 관계교수님의 베트남의 역사와 지리, 대학에 관하여 설명이 있었다.

  저녁 7시 30분경에 대우호텔 810호에 여장을 풀고, 구내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동료교수님들과 담소 후 10시에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둘째날(6.17)은 새벽 5시 기상하여 호텔 주변과 호텔뒷편의 투레호수(THU LE LAKE)를 둘러보았는데, 호텔 주변은 간단한 복장의 여자분들이 천으로 된 돗자리들을 가지고 나와 땅바닦에 갈고 요가나 윗몸 일으키기등 운동들을 하고있었으며, 남자분들은 장소를 달리하여 이곳 저곳에서 스트레칭 같은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었고, 호수주변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그룹으로 궁후등을 하고 있었다.

  호수 주위에는 하노이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어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새벽에는 무료로 관람이 되지만 일과 시간에는 2,000동(약 120원 가량)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으며 베트남의 어디든지 표파는 사람과 표 받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7시에 호텔 2층 부페식으로 조식을 마치고 9시에 버스편으로 호텔을 출발하여 1시간 30여분 하노이의 남쪽을 달려 린빈 지역의 "번롱"에 이르러 2인용 삼판(장대로 밀든지, 노젓는 배)을 타고 왕복 약 2킬로미터의 유람을 하고 그곳에서 한식으로 중식을 호텔로 돌아오면서 일부는 서라벌 식당부근에서 선택적으로 전신맛사지(30$)을 하고 우리 일행은 베트남의 수퍼마켓과 뒷길을 거닐면서 거리의 이발소, 가게, 오토바이 물결을 보면서 과일가게에서 남국의 인분 냄새나는 과일, 망고, 야자맛을 보고 저녁 6시경에 호텔 1층에서 한정식으로 식사를 하고 구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 다음 취침을 하였다.

 

 

  셋째날(6.18)은 주일이었고 기독교수들이 모여서 주일예배를 드리려고 유인물을 준비해 갔으나 시간과 장소가 여의치 못해 각자 경건회 및 묵상으로 예배드리기로하고 유인물을 몇분께 전달하였다.

  어제 밤에는 천둥번개가 치고 태풍이 불어 오는 듯하여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아침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구름은 조금끼었으나 멀쩡하다. 이른바 열대지방의 스콜 현상이 밤에 있었는듯하다 

  5시 30분에 모닝콜하여 6시 30분에 호텔 부페식으로 조식 후 7시 50분 쳌크아웃하고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호지명)" 의 영묘(시체를 방부제 처리하여 엄숙하게 전시한)를 관람하고 이어지는 대통령궁, 호지명 생가, 호지명 집무실, 호지명 박물관을 관람 후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은 게안성(省) 출생으로 본명은 구엔타트탄(Nguyen That Thanh)입니다. 민족해방 최고 지도자이자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입니다.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민중봉기가 한창일 때 하급관리 출신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반(反)프랑스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베트남 북부 위에의 코크호크대학에서 공부한 뒤 1911∼16년 프랑스 외항선 요리사가 되어 각국의 현실을 경험하였으며 17∼23년 프랑스에서 구엔아이쿽(애국자 구엔)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해방운동에 참가, 혁명지도자로 성장하였습니다.

1919년 제1차세계대전 종전처리를 위한 베르사유강화회의에 정치범 석방, 집회·결사의 자유 등 베트남인민의 자결을 촉구하는 <조국해방을 위한 8항목>을 제출함으로써 유명해졌습니다. 1920년 프랑스공산당 창설에 참가, 당원이 되었고 다음해 프랑스 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 기관지 《르 파리아》를 창간하였습니다. 1924년 모스크바코민테른 제5차대회에 참여한 뒤 코민테른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베트남 청년혁명동맹을 조직, 혁명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1930년 홍콩으로 건너가 국내 좌익조직을 결집하여 베트남공산당(뒤에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설하였습니다. 이듬해 홍콩에서 영국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이때 사망설이 나돌아 모스크바에서는 장례식까지 치러졌으나 1933년 석방되었습니다. 1941년 베트남에 잠입,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주축으로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를 규합하여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 총투쟁을 준비하였습니다.

1942년 투쟁지원요청을 위해 중국에 갔다가 중국국민당에 체포, 투옥되었으며, 이때부터 '깨우치는 자'라는 뜻을 지닌 호치민[胡志明]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석방 후 45년 8월 총봉기를 감행하여 하노이를 점령,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1946년 프랑스와의 교섭이 결렬되자 대프랑스 항전을 직접 지휘하였고 1954년 디엔비엔푸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같은 해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어 북베트남 정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여 55년 북위 17˚선 이남에 반공산주의 베트남정권이 수립되자 조국재통일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미국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혁명정신을 고무시키며 항전하다가 1969년 9월 3일 심장병으로 죽었습니다.

호치민은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제2차세계대전 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로 꼽힙니다."

 

베트남은 어딜가든지 호치민을 바코(큰아버지/아져씨)로 애칭하며, 그를 민족의 최고 지도자로 받들고 있었다. 그는 평생 검소한 생활과 독신으로 담배를 즐겨 피웠으며, 유언으로 2가지를 남겼는데 "첫째는 모든 국민이 결혼을 하여 후손을 많이두고, 둘째는 건강을 위하여 담배를 피우지 말라"라고 하였다 한다.  

 

베트남 농협(라덱스 전시장)을 들려 12시에 서울식당에서 한식으로 중식 후 1시경에 하롱베이로 출발하였다.

 

  약 4시간 걸려 하롱베이로 가는 농가의 풍경은 봄과 가을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즉 한쪽에서는 모내기를, 옆에서는 벼베기를 한다. 베트남은 자원과 인력이 풍부한 나라로, 우리나라 60-70년대와 같이 부지런히 일은 하지만 수득이 늘지 않는 후진국적인 산업형태이지만 언젠가는 형편이 좋아질 것같은 꿈틀거림이 보이는 듯 이곳 저곳에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고, 국민들도 부지런해 보인다. 하롱베이로 가는 중간 지점에 우리나라 교민들이 운영한다는 휴게소 겸 상품 전시장에서 휴식 후 5시경에 하롱베이의 "프리자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 옆 건물에 위치한 진주전시장을 관람 후 버스로 이동하여 한국음식점에서 저녁 식사 후 7시경 호텔로 돌아와 현지시간 2시(한국시간 4시)에 한국과 프랑스와의 월드컴 두번째 예선전을 관람키 위해 일찍 잠을 청하고 자는둥 마는둥 1시경에 일어나 예전전을 자막으로만 관람하였다

 

  넷째날(6.19) 6시에 호텔 조식 후 쳌아웃하여 유람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3,00여개의 섬이 운집해 있는 하롱베이 관광에 나섰다. 유람선은 1층은 30여석의 좌석과 2층은 갑판이면서 간이의자 10여개가 있어서 우리일행은 여유있게 지낼 수있었으나 무더운 날씨에 태양이 작렬하였으므로 힘든 유람이었다. 30여분 달려 동굴에 이르러 하선하여 30여분 괌하고 다시 승선하여 가두리에서 "다금발이"를 구매하여 회 맛을 보고 30여분 항해하여 우주백인이 인공위성에서 귀환하다 발견했다는 400여 개단을 올라 산꼭대기에 정자가 있는 섬에 도달하였다. 작지만 귀한 모래사장과 해수욕장이 있는 아름다운 섬에는 판매시설도 있어서 1$하는 야자수 맛도 보았다. 돌아오는 항해길에 다금발이 매운탕을 겯들인 점심식사를 선상에서 해결하고 1시경에 항구로 돌아와 버스편으로 4시간을 달려 5시경에 하노이시내에 이르러 일부는 전신맛사지, 대우호텔 사우나, 우리 일행은 대우호텔 뒤편의 투레호수가의 하노이 동,식물원을 관람하고 7시에 버스 편으로 이동하여 베트남 전통 식당에서 부페로 저녁식사를 하고, 쇼핑센타에 들려 시간을 보내고 10시경에 하노이국제공항(노이바이)에 이르러 출국수속 후

 

다섯째 날 밤12시 40분 베트남 항공기 편으로 베트남 땅을 떠나 6시 40분경(비행시간 4시간, 시차 시간 2시간)에 인천공항에 도착 하였다.  

 

  

후기: 더운 계절에 무더운 나라로 연수를 간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그들을 이해하고 지구촌의 공동체로서 같이 함께 살아가야한다. 민족성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국민이다.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서 산업연수생으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온 베트남 젊은이들은 우리 한국인들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마치 60년대 독일로 일자리를 구해 떠났던 우리의 간호원들과 광부들의 심정과 같으라라 , 우리 도시의 거리거리 마다 나붙은 “베트남 처녀와 결혼 알선”현수막을 보면서 경제가 어렵다고 그런 대접을 받는 베트남 국민들을 깊이 생각해 보면서 국가가 부강해야 국민의 자존심도, 자긍심도 있구나 되새겨 본다.   

 

                                      하노이 상공에서 바라본 베트남 땅

                       공자를 기리는 문묘 내에서 공연하는 베트남 공연단

                                           수중 인형극을 공연하고 있는 곳

                                                          대우 하노이 호텔

                                    린빈지역  번롱에서 전통적인 2인승 삼판으로 유람

                                 베트남에 약 3,000만대가 있다는 오토바이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호지명)의 영묘

                                   하늘에서 용이 내려왔다는 하롱(下龍)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