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스크랩] <2>인천..단동-압록강 유람선(2011.8.23)

ksn7332 2013. 1. 5. 20:12

 

 

☆… 오후 4시 30분,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출발했다. 길목에는 멋지게 쭉쭉 뻗은 소나무의 울창한 수림이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백두산의 초입인 이 이도백하 부근의 ‘미인송(美人松)’ 군락은 아주 특별해 보였다. 하늘을 향하여 뻗어 올라간 소나무의 자태가 장관이다. 언뜻 보기에는 남쪽 동해안의 백두대간에서 본 금강송(金剛松)과 비슷한데, 그것과는 또 다른 풍모를 보였다. 미인송은 일단 그 줄기가 깎아 세운 듯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곧게 뻗어 올라간다. 그리고 그 높이가 보통 40미터 정도로 크게 자란다. 그리고 나무의 중상단부에서 가지가 뻗어나가 우아한 풍모를 보이는 것이다. 한 그루 한 그루가 멋지고 장대하다. 길의 좌우에 미끈하게 쭉쭉 뻗은 그런 소나무들이 빽빽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얼마나 장관인가. 그래서 미인송인 모양이다. 이 지역의 도로는 모두 백두산의 처녀림를 헤치고 만들어진 길이다. 중국은 이 지역 서파 산문 입구에 비행장까지 만들어 관광객 유치에 진력하고 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이도백하를 출발하여 길림성의 주요 산업도시인 백산을 거쳐 오늘의 숙소인 통화(通化, 퉁화)를 향하여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길 좌우에도 예의 백두산의 주목인 자작나무의 백화림이었다. … 차가 노수하(露水河)-북강(北崗)을 송강하(松江河)에 도착한 것은 6시 24분이었다. 송강하는 작년에 필자가 다녀온 백두산 서파(西坡)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자작나무 숲으로 난 길, 여름의 뜨거운 해도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 오후 6시 44분 차가 무송(撫松) 갈림길을 지나면서 201번 도로로 접어든다. 201번 도로는 왕복 2차선 길이지만, 요동반도의 끝 요녕성(遼寧省, 랴오닝성)의 대련(大連)-단동(丹東)-관전(寬甸)-환인(桓仁)을 지나, 길림성(吉林省, 지린성)의 통화(通化)-백산(白山)-돈화시(敦化市)를 거쳐 흑룡강성(黑龍江省, 헤이룽장성)의 모란강시(牡丹江市)에 이르는 중국의 동북 3성을 잇는 주요 국도이다. 이 길목에 있는 환인(桓仁)[註8]은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졸본성(卒本城)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길림성의 돈화시(敦化市)[註9]는 바로 유서 깊은 우리의 발해(渤海)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있던 도읍지가 아닌가. 이 길은 우리 고대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인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에 이르는 역사의 강이다.

[註8] 환인(桓仁, 환런)의 고구려 졸본성(卒本城), <오녀산산성(五女山山城)>

오녀산산성은 BC.37년부터 AD.3년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나라의 기틀을 잡는 초기 40년 간 수도의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오녀산산성>은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는"는 고사의 기록에 의거 졸본은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흘승골성(紇升骨城)과 같은 곳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현재는 환인(桓仁, 환런) 이라는 이름으로 명명 되어 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이 환인의 <졸본성>은 BC. 37년 북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이 정착한 근거지로, 현재가지 성벽과 성 돌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는 고구려 최초의 도읍지이다. 광개토태왕 비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시조 추모왕(鄒牟王)께서 처음으로 기틀을 세우셨다.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오녀산산성(五女山山城)은 환런시 중심에서 8km 떨어진 곳에 있는 자연의 성벽에 둘러싸인 성이다. 오녀산산성이라는 이름은 아주 오랜 옛날 이곳에 다섯 명의 여신이 살아 산과 마을을 수호해 주었는데 흑룡과 싸우다가 전사해 이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재에 등재되되어 있다.

[註9] 발해(渤海, 698∼926년)

중국 동북(東北) 지방의 동부·연해주·한반도 북부에 위치 해 있었다. …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다. 신라로 귀화한 사람, 당으로 들어간 사람, 만주의 말갈족과 혼재하여 사는 사람 등 패망국의 한을 안고 살게 되었다. 당(唐)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로 알려진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大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營州;朝陽)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북동부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나라의 세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696년에 거란족 출신 이진충(李盡忠)이 요서지방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통치하던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1년여 만에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당나라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돌궐의 힘을 비는 등 상당한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고구려 출신인 대조영이 유민들을 규합하고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아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나라는 대조영 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대조영은 공격해오는 이해고(李楷固)의 군대를 천문령(天門嶺) 싸움에서 격파하고 당나라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남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 지금의 길림성 돈화성 부근에 있는 육정산(六頂山))에 정착하여 성을 쌓았다. 그리고 여기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라 하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고, 국호를 발해,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사서(史書)에 진국(震國)이라 칭하던 것을 '발해군' 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재평가되고 있다. … 제3대 문왕(文王)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부왕이 군사력을 이용한 대외적 팽창에 주력한 데 비하여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우선 문왕은 좁은 지역인 동모산(東牟山)에서 벗어나 약간 남쪽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를 건설하고 도읍을 옮겼다. 농경지가 넓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 후 북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하였다(742~755년 사이). 이곳은 발해 북쪽에 세력을 펴고 있던 흑수말갈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발해의 국세는 말갈 세력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또 다시 두만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785~794년 사이). 이곳은 동해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는 물론 관무역의 경제적 발전을 꾀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고, 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와는 경계하는 입장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 일행을 태운 버스가 201번 도로의 만구진(灣泃鎭)-강원구(江原區)를 지날 무렵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백산을 지날 무렵에는 완전히 캄캄한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백산(白山, 바이산)은 산업도시답게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인 화력발전소의 냉각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백산에서 통화까지는 혼강(渾江, 훈강)을 따라 이어지는 왕복 4차선 도로였다. 우리가 통화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9시를 훌쩍 넘었다. 강변도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을 달려왔다. 연길에서 백두산까지 4시간여, 백두산 등정, 다시 백두산에서 통화까지 5시간여… 장장 1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내달려온 것이다. 빡빡한 일정상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만 타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의 호기심은 잠들지 않는다. 여행을 할 때에는 내 감각의 촉수가 오히려 더욱 예민하게 뻗어 나와 아무리 피곤해도 달리는 차 안에서 잠자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탐방해 나가는 곳곳의 지명에서부터 그 주변의 풍경, 특별한 명승이나 유적, 그리고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는 도로망 등을 살피는 일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재미가 쏠쏠한 대목이다. 평소 내가 자주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그런 점에서 나에게는 남다른 ‘역마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행을 하며 새롭게 만나는 지역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서 느끼는 일이 여행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오늘은 몸의 피로를 풀기 위해 일행 모두가 집단적으로 발맛사지를 받고 호텔에 들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작년 나의 백두산․고구려 탐방 가이드였던 김용을 만났다. 김용(金勇)은 흑룡강성 출신의 조선족 청년으로, 아담한 키에 비교적 차분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지녔는데, 안경을 낀 눈매가 명민해 보이고, 한국말과 중국말이 능통했다. 작년 나의 여행 동안 친근하면서도 해박한 역사 지식으로 훌륭하게 안내했던 기억이 났다. 오늘도 변함없이 가이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가웠다. 한 해의 시차를 두고 사람을 이렇게 만나는 것이다.

[제3일] 8월 13일 퉁화→지안[광개토대왕비-장수왕릉-환도산성고분군-국내성]→ 단둥

집안(集安, 지안)은 고구려 국내성(國內城), 400년간 유서 깊은 도읍지

☆…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통화에서 303번 도로를 타고 2시간 동안을 달려 집안(集安)에 도착했다. 집안은 고구려 국내성이 있는 고도(古都)이다. ‘국내성(國內城)’은 유리왕 22년 서기 3년부터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인 427년까지 약 40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했던 곳이다. 가장 오랜 기간(424년) 수도로서 가장 찬란했던 번성기를 누렸던 만큼 1만여 개의 고분과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있다. 환인(桓因, 환런)의 ‘졸본성(卒本性)’에 이은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 방형으로 축조 되었으며, 성의 동쪽으로는 용산, 북쪽 점에는 우산, 서쪽으로 칠성산이 있고 앞으로는 압록강이 흘러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천연 요새를 이룬다. 압록강 서쪽에 위치한 국내성은 총면적 13,000평, 성의 길이 2,686미터, 높이 1~5미터로 총 6개의 성문(城門)과 해자(垓子)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1921년 중국정부에서 성(城)을 개수하면서 옹성(甕城)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동서남북에 각각 세워져 있던 성문마저 194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전투 때 소실되었다. 원래 성벽의 높이는 7미터였으나, 거의 훼손되어 없고 현재 민가가 있는 남서쪽 성벽 3~4미터와 아파트 건물 사이에 위치한 벽 4~5단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날 집안(集安, 지안)은 유구한 역사가 말해 주듯 압록강과 혼강(渾江, 훈강) 수로의 교통, 내륙과 연결되는 육로 및 북한과 이어지는 철도 등이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수많은 고구려의 문화유산이 산재하고 있어, 융성했던 당시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무상한 세월이 이 공간 속에서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있다. 단순한 역사의 시차적 풍경에서 오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중국은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다. 이것이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만주 일대는 물론, 한반도 통일 이후 북한까지 그들의 영토적 범주임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방대한 만주의 고구려 고토가 저들의 영토에 속해 있으므로 마음먹은 대로 진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작년에 왔을 때 가이드 조선족 청년 김용이 말했다. 집안의 <고구려역사박물관>은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물을 양적(量的)․질적(質的)인 면에서 가장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는 데도 이때까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저들의 공정(工程, 프로젝트)을 진행하기 위한 연구용으로만 사용할 뿐이란다. 서길수(徐吉洙, 전 서경대) 교수는 집요한 연구와 고증 작업을 통하여 동북공정의 실체를 많은 사람들에게 환기시켜 주었다. 민족의 얼, 민족자존의 정신이 명징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특히 교육자들은 역사적 인식의 시퍼런 날[刃]을 세우고 연구하고 대비하고 후생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격변하는 세계의 과도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통일 후의 중국의 야심이 동북아 정세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광활한 영토 위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위력의 상징

☆…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서 높이가 6.39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 비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好太王비(碑))'라고도 한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라는 뜻이다. 비석의 주위를 돌면서, 장엄한 대왕비를 바라보는 후생(後生)의 마음은 뜨거웠다. 이 광활한 대지에 고구려의 기백을 장쾌하게 펼치셨던 대왕의 위용이 느껴지는 듯하여 가슴이 뭉클하고 온몸이 출렁거렸다.

이 비는 대왕의 사후 2년(414년)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광개토대왕의 재위 22년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당시 수도였던 압록강 유역인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성(吉林省 集安縣 通溝城)에서 동북쪽 약 4.5km 지점의 태왕촌(太王村)에 있다. 그리고 현재 비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왜냐하면 부근에서 ‘태왕릉이 산악과 같이 안정되고 굳건하기를 원한다(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석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그 규모는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 1.35미터, 2미터, 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겨진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석은 길이 3.35미터, 너비 2.7미터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고, 두께는 약 20센티미터이나 고르지 않으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덮개돌[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광개토대왕의 비석과 태왕릉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관은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비문의 내용(內容)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탐구 자료]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연구(硏究)와 논쟁(論爭)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몇몇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만, 조선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초기의 탁본은 대체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 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1888년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 제5집에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를 게재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다. 여기에서 신묘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문자 )”고 해석했는데, 이후 이 신묘년 기사를 4세기 후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선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는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조작 왜곡하여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과거 불분명했던 자획까지도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석회도부의 결과로서, 고마쓰[小松宮] 탁본을 참고하여 미다쿠[三宅米吉]가 쓴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가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왜이신묘년래도해파’(倭以辛卯年來渡海破)도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이진희, 『광개토왕비의 연구』, 일조각, 1982)

이를 계기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근거로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사학계의 이른바 ‘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지리적 이점이 큰 중국에서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1984년에는 중국의 왕젠췬[王建群]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를 발표했는데, 그는 이제까지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비문의 총 글자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에 등장하는 왜(倭)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도 한계가 발견되고 있다. 도회부분은 탁공(拓工)들이 고가판매를 위한 무지의 소치라고 주장하였는데, 발견 초기의 탁본은 고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닌 것임에도 조작된 것이 나타나는 부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은 그 주체가 고구려(광개토왕)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倭)나 그 외의 것이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이 비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풀어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내용의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고대사를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나아가 한·중·일 3국간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국간의 협동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한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비각을 나와서 2~3미터 크기의 우산처럼 생긴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경내의 보도를 따라 걸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광개토대왕의 능을 찾아간 것이다. 한여름의 열기만큼이나 주위의 초목은 싱그러웠다.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본 감동이 가라앉지 않아 자꾸만 비각을 돌아보았다. 경내는 다른 관광객이 없어 주위의 분위기가 아주 호젓했다. 잔디 사이로 보도블록이 깔린 길 주위로 사람의 키 두 배 정도 크기의 나무가 아주 특이한 모습이다. 한 줄기로 자란 나무 위에서 수양버들처럼 가느다란 실가지를 사방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균형 잡힌 옹기를 엎어 놓은 듯했다. 가장자리로 늘어져 있어 늘어진 가지의 속은 비어 있다. 실제로는 느릅나무의 일종[垂楡, 표지판에 적힌 명칭]이다. 그 외양이 아주 특이했다.

한민족의 웅대한 시대를 구축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태왕릉(太王陵)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비각에서 서쪽으로 약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태왕릉는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로 되어 있는데 높이만 14,8미터, 한 변의 길이가 6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 있고, 철제 계단으로 올라 내부를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내부에는 큰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두 개 있고, 그 겉은 플라스틱틀로 덮여 있는데 대왕과 왕비를 합장한 것으로 보인다. 석실의규모가 생각보다 아주작았다. 오회분(五盔墳)오호묘(五號墓)에 비하면 아주초라한 정도였다. 벽면에는 벽화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단순한 화강암으로 네 벽을 축조해 놓았다. 대형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인 태왕릉은 7단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안은 작은 돌들이 채워 넣어져 있다. 현재 광개토대왕릉 양쪽으로 중국과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인근 장군총(장수왕릉)에 비해 능의 정교함과 예술성이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이곳에서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원태왕릉 안여산 고여악, 태왕릉께 바라옵건대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이라는 명문(銘文) 벽돌이 출토되었고, 광개토대왕비에서도 매우 가까우며 손상되지 않았을 때 무덤의 크기도 장군총보다 클 것으로 추정되어 태왕릉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長壽王陵) 속칭 장군총(將軍冢)

길림성 용산에 있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돌무지무덤으로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의 대정벌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집안의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웅장한 형태의 능으로 고구려의 비약을 상징하는 고분이다.

집안(集安)에 남아있는 1만 2천여 개의 묘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능으로 장엄한 규모와 빼어난 조형미를 갖추어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밑변의 길이가 31.6미터, 높이 12.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방단계단식적석묘(方壇階段式積石墓, 돌을 계단형식으로 네모지게 쌓아올린 형태의 무덤)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길이가 5.7미터인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 1,100여 개를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정면은 국내성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있는데 피라미드 위에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시설로 보이는 일종의 향당 (享堂)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유행하던 묘제의 하나이다.

수많은 고구려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에는 특별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이 적석총(積石塚)을 둘러싼 12개의 받침돌[護石]이 있다는 것과 그 주변의 배총(陪塚)이 있다는 것이다. 호석(護石)은 돌을 쌓아 올린 무덤이 빗물이나 기타 외부압력에 인하여 밀려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기위해 세운 것으로 3개씩 4면에 총 12개가 있는데,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기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는 그 중 하나가 소실되었다. 배총(陪塚)은 현재 하나만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이 장군총의 네 모서리 방향에 있어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수호신을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배총은 고인돌 형태이다.

고구려인 기상과 영혼의 원형질, 오회분(五盔墳) 오호묘(五號墓)의 고분 벽화

- 우산 아래 고분군 남쪽에 자리한 7세기 고구려 분묘, 지안 고구려 유적지에서 묘실의 화강암 벽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5개의 고분을 오회분(五盔墳)이라고 하며, 그 중 다섯 번째가 바로 오호묘(五號墓)이다. 큰 봉토분 다섯 개가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투구 같다 하여 '투구 회(盔)'자를 붙여 오회분이라 한다. 오호묘는 사호묘와 정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일명 '쌍둥이묘'라고도 한다. 5호묘는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8미터, 무덤 둘레가 약 180미터의 규모이다. 1962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발굴 정리되었기에 국내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가히 고구려 유적의 꽃이라 할 만 하다.

☆… 놀랍고도 실로 감격적이었다. 묘실로 들어가는 계단을 내려가니 후덥지근한 바깥 기온과는 달리 서늘한 냉기가 온몸에 엄습해 왔다. 그것은 일종의 전율이었다. 무덤의 음산함이라기보다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를 만나게 되는 짜릿한 긴장이었다. 나는 지금 1,300여 년 전 고구려인의 인식의 원형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의 무덤 속에서 고구려인의 원형적 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아아,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고구려 고분 벽화를 현장에 와서 그 실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인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신들을 형상화하여 풍부한 설화성을 지니고 있다. 돌 위에 직접 동식물, 광물의 염료를 사용하여 그렸기 때문에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길고 긴 세월을 넘어…

묘실 안에는 세 개의 석관이 놓인 관대(棺臺)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가운데는 주피장자(主被葬者)이고 그를 중심으로 양쪽에 두 기의 관대가 배치되어 있다. 부인과 또 다른 부인의 관이 놓인 자리로 추정된다. 예의 사면의 화강암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7세기 고구려 벽화의 전형적인 양식에 따라 동벽에는 청룡(靑龍), 서벽에는 백호(白虎), 남벽에는 주작(朱雀), 북벽에는 현무(玄武)의 사신도가 신비로운 빛깔로 그려져 있으며, 그 위층에는 28마리의 용(龍)이 역동적으로 뒤엉켜 있는데, 신비로운 기운을 더했다. 그리고 층위별로 각종 문양들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최상단 암벽의 사면의 한 가운데에는 용의 눈에 야명주(夜明珠) 하나씩을 박아 놓아, 어두운 현실(玄室)을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 야광주는 보이지 않고 빈 구멍만 남아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집안의 20여 기의 고분 벽화 중에서, 여기 오호묘는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관람이 허용되는 곳이다. 그러나 묘실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 그 외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사신총(四神塚), 고구려인의 무용과 생활상이 그려진 무용총(舞踊塚), 고구려인들의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각저총(角觝塚) 등이 인근에 있다.

☆… 그런데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보물인 고구려 벽화의 관리 상태가 너무나 부실하다는 것이다. 벽면에는 단순한 습기 이상의 물기가 흘러내리고, 두 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는 천정에서 여기저기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부실한 상태로 버려두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가이드의 말로는 몇 년 전 개방 당시에는 그림의 윤곽이나 채색의 상태가 아주 선명했다고 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해서 훼손이 매우 심한 상태라고 한다. 비싼 입장료를 받고 관광 수입을 올리면서 정작 그 묘실은 이렇게 무도하게 방치하다니 … 참담하고 안타까워 은근히 분노가 치밀었다. 아아, 고구려!

천혜의 요새(要塞), 우산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을 바라보며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지안시 북쪽 퉁구하(通口河)를 따라 약 2.5km 떨어진 환도성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국내성이 평지의 도성인 반면 환도산성은 유사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군사적 위성(衛城)으로 '산성자산성' 혹은 '위나암산성(尉那巖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산성자산의 이름이 환도산(丸都山)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유리왕 21년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 후, 676m의 반원형 산봉우리와 주위 능선을 이용해 만든 총 둘레 7km의 산성이다. 현재에는 흔적을 알 수 있는 터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발 말굽 모양의 불규칙한 타원형 형태의 돌로 쌓아 올린 산성 입구에는 석각으로 된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환도산성에는 현재 약 5m 높이의 북쪽 화강암 성벽(城壁)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飮馬池),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點將臺)를 비롯해 병영터와 궁전터 흔적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언뜻 눈으로 보아도 천혜의 요새지이다.

북한식당 <妙香山>에서의 점심식사

☆… 일행은 오후 1시가 넘어 지안 시내의 북한 식당 <妙香山>에 도착했다. 북한의 음식은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단정한 제복을 입은 접대 아가씨들은 얼굴이 곱고 품행이 깔끔했다. 그러나 웃음이 없는 얼굴은 굳어 있었고, 모든 몸짓이 사무적이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차 안에서 가이드의 주의를 들은지라 우리도 섣부른 말을 걸지 않았다. 식당 안에서는 사진 촬영도 금지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아가씨들이 무대에 번갈아 올라와 노래를 불렀다. 가창력이 좋고 기교가 넘쳐, 노래의 곡절마다 감정이 간드러지고 음색이 애절했다. 그러나 그들 나름의 대남용 레퍼토리는 변함이 없었다. 귀에 익은 노래 ‘반갑습니다’를 시작으로 ‘고향의 봄’을 절절하게 부르며 민족의 원형적 동질성을 호소하더니, ‘장군님’의 젊은 시절의 행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긴 ‘열정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노래가 끝난 뒤 그녀들의 표정은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남과 북, 가깝고도 먼 사람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 분단의 아픔과 보이지 않는 이념의 장벽이 무거운 그림자를 끌며 온몸으로 엄습해 왔다. 철저하게 길들여진 사람들,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될 것 같지 않은 차갑게 절제된 언행, 그것이 왠지 가슴 아팠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는 북한, 지안은 그 국경도시이다. 인생이…, 역사가 어디 아프지 않은게 있었던가. 그 아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엄청난 홍수의 뒤끝 황토물이 넘실거리는 <압록강(鴨綠江)>, 쾌속정을 타다!

 

<2>인천..단동-압록강 유람선-신의주 조망(2011.8.23)

 

<동항 심달보리강해 호텔 조식-출발-압록강 유람선-압록강 단교> 

 

◈ 처절한 동족상잔 전쟁과 압록강 단교(斷橋)

압록강에는 두 개의 철교가 있는데 하나는 신의주와 연결되는 소위 ‘중조우의교(中朝友宜橋)’이며 또 하나는 지금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는 ‘압록강 단교(斷橋)’이다. 단교(斷橋)는 글자 그대로 ‘끊어진 다리’이다. 중국의 단동과 북한의 신의주시를 연결하는 개폐식 철교 옆에 나란히 위치해 있다.

 

압록강 유람선을 타고 단교를 지나서 신의주 가까이 접근하여 북한의 실정을 본 후 일정이 빡빡해 집안으로 가려고 하는 듯 하여 여기까지와서 단교를 보고가야한다고 주장했서 단교에 올라섰다.

아치형 구조물을 따라 강의 중간 부분까지 이어지다가 뚝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북조선 쪽으로 콘크리트 다리발만 남아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 아아, 6·25! 올해 만 60년 세월이 흘렀다.

단교는 본래 일제시대 조선 총독부가 1908년 8월 만주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중에서 약 51만 명의 인력을 동원, 1911년에 완공한 것으로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보급로로 활용되었다. 길이는 944m, 총 12개 교각으로 9번째부터는 강을 오르내리는 범선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90도 회전 가능한 개폐식으로 만들어 열면 십자(十字)가 되고, 닫으면 일자(一字)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마오쩌뚱(毛宅東)이 중공군의 개입을 결정, 이 다리가 중요한 군사 요충지가 되었고, 팽덕회가 이끄는 20만 명의 인민군이 이 다리를 건너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 소위 1,4 후퇴를 유발시킨 그 역사의 시작점인 것이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미군의 B29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곳을 폭격해 중공군의 보급선을 차단했다. 그래서 지금의 반쪽 교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이다.

단교 입구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사령관이었던 ‘팽덕회(彭德懷)’가 앞장서고 그 뒤를 따르는 일련의 중공군의 군상이 막 대교를 건널 듯이 나아오고 있으며 그 옆에는 탁상용 메모지 형태의 안내판이 있었다. 메모판 오른쪽은 중공군이 압록강 다리를 건넌 ‘1950년 10월 19일(경인년 구월 구일 중량절)’의 일력이고, 왼쪽 장에는 다음과 같이 내용이 메모되어 있었다. ‘中國人民支援軍司令員兼政治委員彭德懷于一九五○年十月十九日從安東跨過鴨綠江大鐵橋進入朝鮮指揮偉大的抗美援朝戰爭’(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팽덕회는 1950년 10월 19일 안동에서 압록강대 철교를 건너 조선에 진입,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을 지휘하였다-필자졸역) … 중국에서는 지금 이곳을 애국주의, 공산주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돕는 전쟁이라고 표현하여 한중간 역사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국인에게는 일제의 침략과 수탈, 그리고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가 이 단교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심달보리강해 호텔(5성)

 

 

 호텔 조식

 

압록강 하류 (주민들이 해조류를 채취하고 있음)

압록강 하류 지역으로 철조망 건너편은 북한

단동 압록강 유람선 관광부두

 

압록강 왼편은 북한 신의주, 오른편은 중국 단동

압록강 철교

 

 압록강 유람선 승선

북한의 신의주

 

 

 

 

 

 

 

 

압록강 철교 단교

 

 

 

북한의 신의주

 

 

 

 

 

 

북한의 신의주 압록강각

 

 

 

 

 

 

 

 

 

 

단동의 월량도

중국 단동시내

 

 

 

출처 : 김상남 교수 카페
글쓴이 : SN.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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