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스크랩] 고구려유적지&백두산(2011.8.22-26, 인천노회 장로총대 수련회)

ksn7332 2013. 1. 5. 17:03

 

고구려 유적지 & 백두산(2011.8.22-26)

                                                                                  인천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김상남 교수

 

 2011년 인천노회 장로총대수련회를 '고구려유적지 탐방 및 백두산 등정(중국)'으로 인천-대련-단동-집안(국내성)-통화-백두산(서파)-통화-환인(졸본성:오녀산성)-단동-대련-인천을 아래 내용과 같이 은혜스럽고 알차고 의미있게 마쳤습니다.    

  2005년 6월 말경 교수연수로 심양-연길-백두산-용정-도문을 다녀 온 후 두번째 방문의 만주 벌판은 4박5일 동안 내내 30여시간 버스로 달리고 둘러 본 동북 2성(요령성, 길림상)은 달리고 달려도 우리 국토의 충청북도나 강원도 지역을 여행하는 느낌이었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국 땅이라는 느낌은 없었으며, 주민들 또한 다른 나라 국민 같지 않아서 역시 고구려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통한의 아쉬움은 단동과 신주의, 압록강변 따라 위화도, 태평만 댐 그리고 집안(국내성)과 강 건너 있는 북한의 만포시 등 국경에서 너무나 차이가 나는 생활상을 보면서 '어느때 까지입니까?"하는 반문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8월 22일 인천공항(CZ686)을 출발하여 대련공항에 도착하여 중식 후 '성해공원'과 대련시내를 둘러보고 버스로 4시간을 달려 국경도시 단동으로 이동하여 단동시의 동강지역에 위치한 '심달보리강호텔' 세미나 룸에서 도착예배(인도:김상남 장로, 말씀:조종수 장로, 기도:김헌태 장로, 광고:서경호 장로)를 드리고 첫날을 보냈습니다.

   8월 23일 새벽 5시에 기상하여 꿈에 그리던 북한땅 '신의주'를 가까이 바라조망하는 '압록강 유람선'에 탑승하여 화려한 중국 단동과 쇠퇴한 신의주를 비교 바라보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일으킨 역사의 현장의 실상을 회상한 후 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의 물자수송을 막기위해 미국의 폭격기가 폭파시켜 지금은 관광지가 된 '압록철교 단교' 올랐고 점심식사 후 압록강변을 따라 북한땅을 지척에 바라보면서 4시간을 달려 고구려의 둘째 도읍지 집안(국내성)에서 국내성 성벽터,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등을 둘러보고 2시간을 달려 백두산 지역의 중심도시 '통화'에 이르러 '동산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8월 24일 새벽 5시에 기상하여 호텔식사 후 4시간을 달려 백두산 '서파'에서 백두산 등정을 시작하여 '백번가면 두번 맑은 천지를 본다'는 백두산을 맑은 날씨에 관람을 하고 '제자하' '금강계곡'을 경유하여 4시간을 달려 통화의 동산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8월 25일 새벽 5시에 기상하여 호텔식사 후 2시간을 달려 고구려 첫째 도읍지 환인, 깍아지른 자연 요쇄인 '졸본성'(오녀산성)에 이르러 999개의 계단을 직선, 혹은 갈지자로, 혹은 가마를 이용하여 올라 졸본성 정상에서 왕궁터, 천지 등 유적지를 관람하고 댐을 막아 대형 호수가 된 '비류수'를 내려다보고 좁은 협곡을 내려와 환인 시내에서 점심식사 후 4시간을 달려 수풍댐의 아우인 '태평만댐'을 인근에서 휴식 후 단동에서 저녁식사 후 4시간을 달려 밤11시경에 대련 '홀리데이 인'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8월 26일 새벽 5시에 기상하여 호텔식사 후 대련공항에서 8시 30분 발 인천행 중국남방항공을 이용하여 10시 40분경에 인천공항에 착륙함으로 수련회의 막을 내렸습니다. 

   좋은 날씨와 일정을 허락하셔서 장거리 버스운행과 두차례의 산행(백두산 1300여계단, 졸본성 999계단)이 겹쳤음에도 건강하게 잘 마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수련회를 후원하여 주신 인천노회 노회 목사님, 장로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팀을 안내한 '호산나투어'의 정성영 팀장과 '연변홍성여행사'의 가이드 원인호 실장, 중국인 운전기사 분들께 감사드며, 빡빡한 일정으로 끈기와 체력을 요구함에도 낙오없이 참가하신 총대 장로님과 권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11년 8월 26일 인천노회 교육부 장로총대수련회 추진위원회 올림

<더 자세한 내용과 사진은 인천노회 장로회 카페  http://cafe.daum.net/icelder '장로총대수(2011.8중국)방'을 이용바랍니다.>

 

 

 백두산 천지

 

 

 

 중국 5대 도시 대련의 성해공원

 

 

단동의 월량도 

<압록강 너머 신의주를 바라볼 수 있는 중국 최대의 변경도시, 단동(丹東)>

  단동시는 요녕성 동남부인 압록강 하구부의 신의주 대안에 위치한 면적 1만 4918km², 인구 239만명인 중국 최대의 국경도시이다. 동강시 봉성시 관전만족자치현과 진흥구 원보구 진안구 등 3개구로 나누어져있고 북한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옛 이름은 안동(安東)이었으나 1965년 도시 이름을 단동으로 개명하였으며, 그뜻은 "아침해가 뜨는 붉은도시"란 뜻이다.

현재는 중국 최대의 변경도시이면서 최북단의 연해도시로써 단동이 가진 특유의 자연조건과 오랜 역사가 지닌 문화유적들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방문하고있다. 특히, 건너편으로 북한을 볼 수 있는 압록강은 단동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여러가지로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평양과 북경을 달리는 국경열차가 이곳을 통과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현대적 건물이 도시 곳곳에 세워지는 등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삼림면적 비율이 51%를 차지하고 있으며, 120km의 아름답고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단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압록강 근처에 위치해 강 사이로 북한 신의주를 볼 수 있는 압록강 공원과 6.25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교각만 남아 있는 단교, 산 정상에 서면 단동시내는 물론 신의주까지 볼 수 있는 금강산공원 그리고 고구려 천리장성에 해당되는 박작성 등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기 B29의 폭격을 받아 일부 교각만 남아있는 아치형 철교>

압록강에는 두 개의 철교가 있는데 하나는 신의주와 연결되는 "중조우의교(中朝友宜橋)"이며 또 하나는 관광지로 개발된 "단교(斷橋)"이다.

단교는 본래 일제시대 조선 총독부가 1908년 8월 만주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중에서 약 51만명의 인력을 동원, 1911년에 완공한 것으로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보급로로 활용되었다.

길이는 944m, 총 12교각으로 9번째부터는 강을 오르내리는 범선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90도 회전가능한 개폐식으로 만들어 열면 십자(十字)가 되고,닫으면 일자(一字)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이 압록강가까지 진격하자 모택동이 중공군의 개입을 결정, 이 다리가 중요한 군사 요충지가 되었고, 미군이 이곳을 폭격해 지금처럼 일부 교각만 덩그라니 남아 단교가 되고 말았다.

단교 입구에는 한국전쟁당시 군사령관이었던 팽덕회와 중공군의 동상이 있으며 중국인들은 이곳을 애국주의, 공산주의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이렇듯 한국전쟁 참전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돕은 전쟁이라고 미화하여 한중간 역사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국인에게는 일제의 침략과 수탈, 그리고 한국전쟁의 아픈 민족사가 이 단교에 남아있다.

 

<압록강유람선(鴨綠江遊覽船)>

한반도와 중국 만주벌을 사이에 두고 802km를 흘러내리는 압록강은 국경 경계선으로 단동과 신의주, 집안과 북한 만포시의 경계이다. 단동시 남쪽 압록강변에는 압록강을 돌러볼 수 있는 유람선 선착장이 자리하고 있다.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해서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압록강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의 연락로로 이용되어 왔으며, 멀지않은 강 건너에 보이는 곳이 바로 북한 지역이다. 여름철에는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빨래를 하고 있는 부녀자들의 모습, 20세도 채 안된 앳된 모습의 국경수비대들이 강길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다.

 

 국경도시 단동

 압록강 철교 단교

 북한의 신의주 항 주민실상

  북한의 신의주 항 주민실상

 압록강 유람선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곳 집안> 

집안(集安)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의 현재 지명으로 길림성 동남쪽에 위치한다. AD 3년경 고구려 제 2대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는데 427년까지 가장 오랜기간(424년) 수도로서 가장 찬란했던 번성기를 누렸던 만큼 1만여개의 고분과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있어 이곳이 국내성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북온대 대륙성기후로 사계절이 뚜렷하고 연평군기온은 6.5℃이며, 강우량은 약 1000㎜ 정도이다. 유구한 역사가 말해 주듯 압록강과 훈강 수로의 교통, 내륙과 연결되는 육로 및 북한과 이어지는 철도 등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군총 등 고구려의 많은 문화 유산이 산재하고 있어 융성했던 시대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집안(국내성)의 광개토대왕비(중국측에서는 호태왕비)

  광개토대와의 아들 장수왕릉

 

<백두산 서파코스(서백두)> 

백두산의 동남쪽은 북한, 북서쪽은 중국지역이다. 북한지역은 갈수 없기 때문에 북서쪽만을 등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주된 코스는 북쪽(북파) 능선. 대부분 차로 이동해 5분 정도 걸어 천지를 내려다 보는 북파코스는 등정이라기보다는 관광에 가깝다.

백두산 중국지역은 크게 북파와 서파로 나뉜다. 천지를 중심으로 북파는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며 서파는 완만한 고산지대를 이루고 있다. 아직 덜알려진 서파지역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광활한 초원지대와 지천에 야생화가 흐드러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고산지대를 비롯해 신비한 연못으로 알려진 왕지, 천지가 용암을 분출하며 만들어낸 금강대협곡, 거대한 용암이 지하로 흘러 생겨난 제자하, 높이 80m의 금강폭포, 진주온천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2시간정도의 가벼운 트레킹으로 멋진 풍광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중국 당국이 1995년부터 개발에 착수했으나 생태계 및 등산 전문가 등에 한해 접근을 제한적으로 허용해오다 98년부터 일반 관광객을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서쪽 백두산은 천문봉이 위치한 북쪽 백두산과 달리 보호구역을 설치하고 호텔 등 휴양시설이나 콘크리트 도로 등을 개설하지 않는 등 환경보전에 주력한다. 

백두산 서파 탐방코스는 중국 길림성 안도현 이도백하진에서 출발해 해발 1,500m의 백두산 서쪽 산문을 거쳐 청석봉, 용문봉으로 올라가는 곳곳에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온갖 야생화가 만발해 장관을 이룬다. 고산화원으로 불리는 야생화 군락지에는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큰원추리, 금매화, 노란만병초, 하늘매발톱, 바이칼꿩의 다리, 산용담, 개불알꽃 등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다양한 1,800여종의 야생화가 자태를 뽐내며 백두산을 수놓는다..

백두산 서편에서 즐기는 트레킹의 묘미는 천지 봉우리에서 뻗은 완만한 초원(수목생장선 위편)의 꽃대궐 구릉을 걸어 천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청석봉 능선까지 초원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을 보며 걷는 것. 누구나 오를 수 있을 만큼 경사가 완만하다. 백두산의 아름다움을 온 종일 감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들꽃 트레킹 코스.

기묘한 용암지형으로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금강 대협곡과 고산연못 왕지, 그리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금강폭포를 찾아가는 고산화원 트레킹도 있다.

 

 백두산 서파 산문

 

<민족의 영산, 백두산> 

높이 2,744m로 북위 41˚01´, 동경 128˚05´에 있으며 한국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백색의 부석(浮石)이 얹혀 있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국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였다. 또 단군(檀君)이 탄강(誕降)한 성지로 신성시해왔다. 중국 금대(金代)인 1172년에는 영응산(靈應山)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대(淸代)에는 이곳을 왕조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다.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창바이산맥[長白山脈]의 주봉으로 최고봉은 병사봉(장군봉:2,744m)이다.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2,712m), 쌍무지개봉(2,626m), 청석봉(2,662m), 백운봉(2,691m), 차일봉(2,596m) 등이 있다. 남동쪽으로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 뻗어 있다.

휴화산으로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여러 시대의 지층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생대와 신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단열구조, 파열구조 단층이 발달하였다. 화산분출은 쥐라기(약 6억 년 전)에서 신생대 제4기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신생대 제3기부터 활발히 진행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질 용암이 대량 유출되어 약 5,350㎢의 넓은 백두용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약 20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약화되어 지금의 산세를 형성하였다. 화산활동 후기에는 대연지봉, 소연지봉, 대각봉, 무두봉, 베개봉, 청봉 등 부속화산들이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적갈색 다공질현무암용암의 분출로 생겼다. 최근의 분출은 1597년·1668년·1702년에 있었다고 문헌에 전하고 현재는 백두산 주변 50km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시 용암이 잘게 부서져 쌓인 부석층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천지 부근의 부석층은 두께가 20m 가량 된다. 화산재, 화산탄, 화산모래 등의 층도 남아 있다. 토양은 여러 해 동안 동결층의 영향과 한냉한 기후에서 형성된 토양, 평탄한 현무암대지 파습조건에서 형성된 토양과 수평대성을 띤 포드졸성 갈색산림토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고산기후이며, 한국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하다. 연평균 기온은 6∼8℃, 최고기온 18∼20℃, 1월 평균기온 -23℃(최저 -47℃), 1월의 평균 일교차는 7.5℃, 7월의 평균 일교차는 4.8℃이다. 연평균 상대습도는 74%이며 여름에 가장 높고 겨울에 낮다. 북서풍과 남서풍이 강하게 불고 최대 풍속은 40m/s,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며, 천지 부근은 강한 돌개바람인 용권이 자주 일어난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지방에서 오는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안개가 많이 끼는데 7~8월에 안개가 끼는 날수는 33일 가량 되며, 구름이 많고 천둥현상이 잦으며 주로 눈·비를 동반한다. 벼락회수는 연간 48회이고 그중 60∼70회는 6∼7월에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이며,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된다. 백두산에 서식하는 동물은 검은담비, 수달, 표범, 호랑이, 사향노루, 사슴, 백두산사슴, 산양, 큰곰 등 희귀동물이 많고 204종의 조류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 등이 있으며, 특별보호대상 조류로 메닭, 세가락메추리, 북올빼미, 긴꼬리올빼미, 흰두루미, 재두루미, 원앙, 청둥오리, 붉은허리제비, 숲새 등이 있다. 북살모사와 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으며, 천지에 어류는 살지 않는다.  

300과 2,7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데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종비나무, 잎갈나무, 좀잎갈나무, 백두산자작나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교적 분포속도가 빠른 식물종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받기 전의 식물종들이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 자란다. 이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구름꽃다지·백리향·만삼·왜당귀 등이 자란다. 빙하기 이후 고산조건에 적응한 담자리꽃나무, 시로미, 물싸리, 두메김의털, 장군풀, 산할미꽃, 두메아편꽃, 큰산싱아, 각씨투구꽃, 끈끈이주걱, 두루미꽃, 눈사버들, 구름국화, 바위구절초, 만병초 등 한대성 식물들이 자란다.

또 매저지나무·들쭉나무·백산차 등의 냉대성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금방망이·삼잎방망이·자주꽃방망이·무수해·황기·부채붓꽃·손바닥란·동의나물·분홍노루발풀·왕바꽃·메바꽃·구름범의귀풀·물매화 등 냉대성 초본식물들이 있다.

산 정상에는 칼데라호인 천지(天池)가 있는데 면적 9,165㎢, 평균수심 213m, 최대수심 384m이다. 천지의 물은 높이 67m의 장백폭포(長白瀑布)가 되어 얼다오바이강[二道白河]으로 떨어져 쑹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천지에 시원을 둔 폭포는 백두폭포·사기문폭포·형제폭포·백두밀영폭포 등이며 압록강 상류, 두만강 상류, 산다오바이강[三道白河]으로 흘러들어간다. 천지에는 백암온천과 새로 개발된 백두온천이 있으며, 주변에 장백온천과 제운온천이 있다. 허항령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지연(三池淵)은 대소 4개의 얕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위 길이가 4.5km, 수심 3m인 천연호수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난 휴양지이다. 문화재로는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있다.

 

<백두산 천지> 

면적 : 9.17km2, 둘레:14.4km, 최대너비:3.6km, 평균깊이:213.3m, 최대깊이:384m, 수면 고도는 2,257m이다. 칼데라호(caldera 湖)인 천지 둘레에는 장군봉(將軍峰)을 비롯한 화구벽 오봉(火口壁五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호수 북쪽의 한 곳이 터져서 물이 흘러나가는, 달문(?門)이라고 하는 화구뢰(火口瀨)를 이룬다. 천지의 물은 높이 68m의 장백폭포(長白瀑布)가 되어 얼다오바이강[二道白河]으로 떨어져 쑹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천지에 시원을 둔 폭포는 백두폭포, 사기문폭포, 형제폭포, 백두밀영폭포 등이며 압록강 상류, 두만강 상류, 산다오바이강[三道白河]으로 흘러들어간다 호수는 여기서부터 흘러내려 650 m 북류하다가 용암벽에 막혀 길이 30m의 장백폭포를 이루면서 협곡을 만들며 쑹화강[松花江]으로 유입된다.

천지의 물은 세 개의 샘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지하수(30%)와 빗물(70%)로 되어 있고, 수질은 식수 허용범위에 들어갈 만큼 양질이다. 물줄기는 압록강,두만강 송화강으로 흐른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진 경계비. 백두산은 고구려나 발해의 시기에는 우리나라 땅이었으나, 그후 우리나라의 판도가 반도로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1437년(세종 19)에 설치했던 6진(六鎭)으로 백두산과 그 동서의 두만강·압록강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때 두만강 상류의 무산지방(茂山地方)은 미개척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 1674년(현종 15)에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하여 두만강 내 지역 전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다. 이리하여 조선과 청과의 국경은 압록·두만의 두 강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 원류인 백두산 근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두 강 상류의 북안은 일종의 공백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에서도 특히 동부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일대 삼림지대는 인삼·모피·진주 등 특산의 보고(寶庫)였으며 지린[吉林]의 영고탑(寧古塔)은 이러한 특산물 집산지의 하나였다. 이에 날로 융성해지는 청나라는 이 지역을 한인(漢人)·몽골인 등 주변 민족의 침범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그위에 양유를 심어놓았으며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만들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선과의 접경에도 해당되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인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채취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월경사건(越境事件)은 자주 발생하여 문제시되었고, 청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국왕과 동석하여 죄인을 심리한 일도 3번이나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우리나라의 국경을 넘는 월경침입이 자주 있었으며, 때로는 수십 명이 작당하여 우리측의 관원과 군병을 납치한 일도 있었다.

1677년(숙종 3)에는 청 강희제(康熙帝)가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내대신(內大臣) 무묵납(武默納)에게 명하여 장백산 지방을 답사시키고 다음해에 신하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6년 후에 다시 치제했다.

1691년 조선의 조정은 청대신 5명이 영고탑을 경유하여 장백산에 가서 그곳을 관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크게 놀랐다. 그뒤 1710년에는 위원(渭原)의 이만기(李萬技)가 국경을 넘어 삼을 캐며 그 도중에 만주인 5명을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백두산을 귀속하려는 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따라서 2년 후인 1712년에 청은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국경을 실지답사시켰는데, 조선은 그 소식을 그해 2월 24일 청 예부(禮部)에게서 통고받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에 불응하자는 측도 있었으나, 결국 응하기로 하고 접반사를 임명해 파견했다. 목극등은 싱징[興京] 방면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따라 올라가 후주(厚州)에서 조선의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 후 혜산진에 이르러 여기서부터 육로를 택했다. 이때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다.  

   그리고 조선접반사군관·차사관(差使官)·통관(通官) 등과 더불어 백두산의 꼭대기에 이르러 그해 5월 15일에 정계비를 세운 후에 무산으로 갔다. 그리하여 조선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의 일방적 조처로 정계비가 세워졌다. 따라서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세우기로 했던 정계비를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와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물이 강원(江源)에서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곳의 바위를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며 비면에 '대청'이라 행서하고, 그 아래에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比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종서(縱書)하고 청의 필첩식(筆帖式), 조선의 군관·차사관·통관의 성명을 각서(刻書)했다.

이와 같이 정계비는 청의 일방적 건립이었으므로, 조선 말기에는 청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임의로 유리하게 해석함으로써 경계문제가 양국간의 문제로 재연되어 간도(間島)의 귀속문제에 연결되었다.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하여금 정계비를 조사케 하여, 정계비문 가운데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를 근거로 해서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며, 정계비 근처의 물 한줄기가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토문강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러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없어졌다.

 서파 산문을 통해 서틀버스로 중간까지 올라가 1300여 계단을 걸어서 올라간 북한과 백두산 경계비(5호 경계비)

 

 요령성 환인현의 졸본성(오녀산성)

 

<요령성 만주족자치구 환인현 (桓仁縣)>

 

중국 북부 요령성에 위치한 환인현은 만주족 자치구로서 면적이 3,547㎢의 면적에 총 30만의 인구중 30%가 만주족이며 한인을 비롯 모두 14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있다. 농업인구가 22만명이며 혼강이 중심부로 흐르고, 삼림, 수자원, 광산 등 각종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단동에서 4시간 거리이며, 기후가 좋아 지금까지 큰 수해나 가뭄이 없었으며, 청정자연으로 인삼을 비롯한 한약재와 산호도, 산포도 등의 작물도 품질이 좋다. 무엇보다 환인은 우리나라의 옛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의 터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이 있기도하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재에 등재 되었다.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천혜의 요새-오녀산성(五女山城)> 

주몽이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환인시 중심에서 8km 떨어진 곳에 있는 자연의 성벽에 둘러싸인 성이다.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은 아주 오랜 옛날 이곳에 다섯명의 여신이 살아 산과 마을을 수호해 주었는데 흑룡과 싸우다가 전사해 이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고한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재에 등재되었으며 해발 800미터에 달하는 높이에 특히 윗부분 직벽 100여 미터는 바위덩어리 자체로 깎아지른듯한 벼랑인데다가 위가 반듯하게 잘려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신비롭기 그지없다. 현재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는데 입구에서 우선 가이드가 동행하는 차량을 이용해 10분정도 올라가고, 999개의 계단 혹은 옛길인 십팔반(十八盘: 평평한 돌을 끼워 맞춰 만든18구비의 길)을 이용해 약 40분 정도 올라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나무와 바위밖에 없어보이는 산을 다 오르면 남북으로 1500m 길이, 동서로 200-300m의 넓이로 편평한 땅이 펼쳐지는 데 이곳에서 고구려의 여러 유적지들이 발견되어 졸본성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BC.37년 부터 AD 3년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나라의 기틀을 잡는 초기 40년 간 수도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궁궐터, 곡식창고와 대형 맷돌, 군사들의 집단숙소 등 건물의 터가 곳곳에 남아있으며 고구려 특유의 굽도리 양식이 보이는 성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연못이라는 "천지(天池)"과 태극정(太亟亭),산성 내 전쟁을 지휘하던 점장대(点将台) 등을 볼 수 있다. 주몽이 남문에서 용을 타고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졸본성 999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길

 졸본성에서 내려다 본 비류수(요녕제1경)

 2000여년전 고구려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 오녀산 선성 성담

 

졸본성에서 내려가는 협곡 길

출처 : 김상남 교수 카페
글쓴이 : SN.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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