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06.04)북경

북경졸여(06.4.28-5.1)#8 중식-만리장성(4.29)

ksn7332 2006. 5. 4. 10:41

북경졸여(06.4.28-5.1)#8 중식-만리장성(4.29)

명13릉 관람 후 동인당(내과)과 쌍벽을 이룬다는 보수당(외과)에서 파스 및 외용연고약 설명을 듣고 보수당과 함께 있는 대형 음식점에서 중식 후 1시간 가량 달려서 만리장성으로 ...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 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 강[黃河]을 건너며, 산시 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關]에 다다른다.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베이징의 북서쪽 바다링[八達嶺] 부근부터 쥐융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다퉁의 남쪽 안먼관[雁門關]에 이르는 부분은 2중으로 축성되어 있는데, 2,700km가 전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바다링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허 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기원]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전국시대의 장성은 북방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중원에 나라를 세운 제(齊)·중산(中山)·초(楚)·연(燕)·조(趙)·위(魏)·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했다. 조·연·진 3국이 쌓은 북변의 성벽은 문헌에도 기재되어 있으며, 최근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츠펑[赤峰] 부근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방은 간쑤 성[甘肅省]의 민 현[岷縣]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황허 강의 북쪽을 감아돌아 조의 장성과 합쳐지는데, 그 동쪽 끝을 연의 장성과 연결하여 츠펑부터 랴오양[遼陽] 부근에까지 증축했다. 전한시대 장성의 동부는 거의 진대(秦代)의 것 그대로였으나 서부에는 간쑤의 회랑지대를 흉노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무제시대(武帝時代)에 우웨이[武威]·주취안[酒泉] 2군(郡)을 설치하여 그 북쪽에 장성을 쌓았다. 그후 장예[張掖]·둔황[敦煌] 2군을 설치하여 거기에 축성했던 장성도 주취안으로부터 서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시켰다. 후한시대에는 흉노(匈奴)의 세력이 쇠퇴하여 중국과 싸울 힘을 잃었기 때문에 장성의 보수는 행해지지 않았다.

삼국시대에서 진대(晉代)에 이르기까지 5호(五胡)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어 대거 중국으로 침입해왔다. 그들은 자유롭게 장성을 출입했고 내지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족이 세운 진이 양쯔 강[揚子江] 유역으로 남하하면서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화북지역으로 들어온 선비(鮮卑)는 북위(北魏)를 세웠으나 급속히 중국화했고, 외몽골에서 일어난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장성의 개축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이것은 시황제시대의 것을 보강하는 수준이었다. 북위의 영토를 이어받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도 큰 돈을 투입하여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했다. 이 장성은 산시 성[山西省] 리스 현[離石縣] 부근부터 보하이 만 부근까지 약 1,500㎞에 이르는 규모로서 현재의 장성 선의 위치에 새로이 축성한 것이다. 이때부터 북방의 고대 장성, 즉 전국시대에 시작되어 한과 북위시대에 보수되어온 옛 장성은 버려져 유적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개수와 변천]

수(隋)는 중국 통일 후 장성의 보수에 힘쓰는 한편, 오르도스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자세가 방어보다는 공격 위주로 되었기 때문에 장성을 보수하거나 신설하는 일은 없었다. 오대(五代) 이후 장성 일대가 요(遼)·금(金)·서하(西夏) 등 이민족의 영토가 되어 장성은 거의 방치되었다. 금대에 들어와 몽골 고원의 동쪽 끝에 살고 있던 타타르족(몽골족의 한 부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싱안링 산맥[興安嶺山脈]의 서쪽에 새로 대규모 장성을 축조했다. 이 장성은 현재의 치치하얼[齊齊哈爾] 북서부의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을 넘어 그 일대부터 남쪽으로 뻗어내리다 인산 산맥[陰山山脈] 북측 초원의 서쪽으로 뻗어 바오터우[包頭] 북방에 이르렀는데 그 유적은 지금도 단속적으로 남아 있다. 원은 몽골과 중국땅 모두를 지배했기 때문에 장성이 필요없었으며, 만리장성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몇 번이나 만리장성을 넘었던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 Livre des merveilles du monde〉에 만리장성에 대해서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축성 이후 수백 년이 지나 만리장성의 자태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거의 명대에 축조된 것이다. 영락제시대(永樂帝時代)까지 북방민족에 대해 공격적이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방어적으로 되어 역대로 만리장성을 개축했다. 주로 북제시대의 유적을 기초로 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상당 부분 신설한 것도 있다. 장성의 축조는 이미 영락제시대에 시작되었다. 우선 산하이관부터 다퉁에 이르는 구간을 강화했고, 이어 정통연간(正統年間)에는 베이징의 정면 부분이 2중으로 축성되었다. 더욱이 오르도스 남단의 장성이 개수되었는데 이 부분은 수의 장성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몽골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가정연간(嘉靖年間) 이후 대대적으로 개축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동부에서 착수되어 오늘날과 같은, 전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장성이 만들어졌다. 서쪽 부분은 한대에 축성된 이래 거의 버려진 채로 있었으나 오르도스 남단의 장성에 이어 간쑤에 이르는 부분이 축성되었고, 이어 란저우[蘭州]에서 자위관까지 연장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장성이 거의 완성된 것은 16세기말이었다.

명은 만리장성을 북방의 제1선으로 삼아 거대한 주둔군을 배치하고 구역을 나누어 방위를 담당시켰는데 이것을 구변진(九邊鎭)이라고 불렀다. 명대에는 만리장성을 변장(邊牆)이라고 불렀다. 북변의 변장 이외에도 요동(遼東) 변장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 변장은 산하이관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랴오닝 성[遼寧省] 선양[瀋陽]·카이위안[開原] 부근에까지 이른 뒤 남하하여 압록강 기슭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만주 및 몽골에서부터 신장[新疆]에 이르는 지역이 중국을 통일한 청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만리장성은 군사적 의미를 잃고 황량한 상태로 20세기 전반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정비사업에 착수하여 산하이관과 바다링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과거의 만리장성은 오로지 판축공법(版築工法)을 써서 흙으로만 축조되었다. 황토를 건조시키면 단단한 점토가 되므로 판축은 간단한 공법이었으며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내구성을 갖고 있었다. 황토를 틀에다 넣어 건조시키면 햇빛에 말린 벽돌이 되는데 이것을 구운 것이 전이다. 전으로 장성의 외곽을 둘러싸는 공법은 명대 특히 16세기 후반 이후의 것으로서 지역적으로는 산시[山西] 동쪽 구간에 한정되어 있다. 산시 서쪽 구간에는 전 이외에도 햇빛에 말린 벽돌로 쌓은 부분도 있다.

[군사 및 경제적 역할]

만리장성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돈대가 설치되어 있고,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출입문이 설치되었으며 수비병이 주둔했다. 이러한 장소를 관(關) 또는 구(口)라고 부르는데 산하이관·구베이커우[殺虎口]·쥐융관·두스커우[獨石口]·자위관 등이 특히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만리장성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방위선으로서의 군사적 의미이다. 그러나 북방민족은 세력이 강력해지면 간단히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농경지대를 침입했고 화북의 농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다퉁과 사후커우[殺虎口] 사이, 장자커우[張家口] 부근, 두스커우, 구베이커우가 그들의 중요한 돌파지점이었다. 또 명대 말기에는 산하이관 정도가 청군의 침공에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에는 돌파되고 말았다. 만리장성을 둘러싼 몽골과 만주 간의 무역이 오래전부터 행해져왔다. 만리장성 부근의 촌락에서는 소규모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고, 대규모적인 것은 만리장성 안의 도시를 기지로 하여 대상을 짜서 오지에 들어가기도 했다. 명말 이래 귀화성(歸化城)과 같이 만리장성 밖에 있는 도시가 상업도시로 번영한 곳도 있다. 청대에는 중국의 상인들(특히 산시 상인들)이 정부의 뜻과는 달리 귀화성부터 몽골 고원의 오지에까지 상업을 위해 들어가기도 했다. 만리장성 너머의 무역로로는 러허[熱河:지금의 청더(承德)]·만주 방면으로 가는 것이 있다. 이 경로로 만리장성을 빠져나오는 지점은 당 이전에는 구베이커우였으나, 요대에는 산하이관이 설치되면서 2곳이 되었다. 몽골 방면은 다퉁으로부터 북상하여 더성커우[得勝口] 부근의 관구를 통하는 것이 주요경로였으나 명말부터는 귀화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