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제일교회 파이프 오르겐 제작팀과 DMZ 파이프오르겐 제작팀(미국 픽스사)이 엘림해외선교회 주관 중국인 선교 축제 관계로 오후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오전일만 마치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가운데 교회 승합차 운전기사로 12시경에 교회를 출발하여 경인고속도로- 외각순환- 자유로를 달려 황희정승의 반구정 옆 반구정 나루터집에서 점식식사를 하고 임진각으로 가서 오후3시30분에 출발하는 (도라산 전망대-제3땅굴-도라산역-통일촌)관광코스를 출발하였습니다.
1996년 통일원 통일교수연수단 교육중 통일촌-판문점-도라전망대를 견학한 후 오랜만에 도라본 도라산전망대에서 본 북한 산하는 예전에 없었던 "개성공단"이 손에 잡필듯이 보였고, 태극기가 휘날리는 대성동마을과 인공기가 개양된 기정동마을...을 볼수가 있었습니다.
두번째 코스는 제3땅굴로 50분의 시간을 약속받고 안보관계로 카메라 찰영이 금지된 관계로 사물함에 보관하고 안전모를 쓴 후 700여 M 거리를 30도 각도 내리막길로 내려가 제3땅굴을 관람하고 약간의 땀을 흘리며 올라왔습니다.
세번째 코스는 도라산 역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대통령이 철도 침목에 사인을 하였던 역사적인 곳으로 북한과 철길을 연결했던 곳이었습니다. 입구에는 침목을 기증했던 국민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감회가 깊었습니다.
마지막 코스로는 통일촌 마을로 방문 기념품 및 민통선에서 재배한 농산물 판매 시설이 있었고 외국인들은 티셔스 등 방문기념품들을 구매하였습니다.
모든 코스를 마치고 오후 6시경에 임진각으로 돌아와 교회 승합차편으로 돌아왔습니다.
(기행) 도라산(都羅山156m) - 함동진님 따온글 -
▶ 도라산(都羅山156m) -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에 소재한 아주 쬐끔한 도라산(都羅山156m)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그의 북한에 대한 "악의 축" 발언으로 내국인은 물론 전세계인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리고 있다. 도라산의 명칭인 도라산都羅山을 한자로서의 품고 있는 뜻을 굳이 내 나름대로 해석하여 본다면 "모두 펼쳐 놓은 산"이라 하여도 무방할 듯 싶다. 이제 도라산은 6.25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아물지 않은 그 작은 가슴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한 가운데 활짝 열어 펼쳐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아픈 역사의 현장인 도라산과 그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자.
▶ 도라산(都羅山)에 얽힌 전설 장단읍내 뒤 백학산 서맥내령 맑고 맑은 사천내가 흐르는 냇가 벌판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 156m 도라산 고지는 주위 수목이 우거져 경관이 아름다워 주민들이 여름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명산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라가 경순왕 10년(879)에 폐망하자 경순왕의 11왕자는 사분오열로 뿔뿔히 흩어지니 할 수 없이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천리길 송도를 찾아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유화관(柳花官)을 하사하였으며 정승을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음으로 하여 사심관(事審官)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고려경종 3년(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안장 돠었으며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함에 따라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여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 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조 개창 이후 도라산 마루에 봉수대를 설치 군인들을 주둔시키고 국난시에는 봉화 신호로 송도와 파주 봉수대를 거쳐 한양으로 소식을 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곳은 남북이 갈라진 38선을 지키기 위하여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 국군들이 수호하고 있으며, 제3땅굴과 아울러 실향민과 여러 지역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창화사는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경순왕릉은 영조대왕이 복원한 후 민통선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군인들이 수호 관리하고 있다.
▶ 도라산 전망대 -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에 소재한 도라산 전망대는 송악산 OP폐쇄에 따라 1986. 9. 8.에 사업비 약 3억원을 들여 국방부에서 대체 새로이 설치한 후 통일안보관광지가 되었으며, 북한의 생활을 바라볼 수 있다. 남측의 최북단 전망대로서 남측에서는 유일하게 북한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개성시의 송학산, 김일성 동상, 위장선전마을인 기정동 금암골마을, 개성시 변두리, 차축만이 남아 있는 장단역의 기차화통, 협동농장인 금암골 등을 망원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농촌마을의 북한측 주민의 움직임과 초등학교에서 어린소년들이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 관측되기도 한다. 도라산통일전망대는 연건평 243평으로 관람석 500석, VIP실, 상황실, 주차장(30~40대) 등의 부대시설이 있으며 일반에게는 1987년1월부터 공개되었다 (시) 고지(高地)가 바로 저긴데 이은상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등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1956. 5 「자유문학」창간호 발표)
▶ '희망의 장소' - 경의선 도라산역 한미 양국이 '희망의 장소'라고 의미를 부여한 도라산역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경의선 철도의 남한측 최북단 역으로 한반도의 분단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남북간 화해협력을 동시에 상징하는 곳이다. 특히 부시 미국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2002. 2. 20일 답방한 지역이 됬다. 도라산역은 당초 비무장지대에 복원. 설치키로 했던 장단역이 취소되면서 남쪽의 문산역과 북한의 봉동역 사이에 신설된 역으로, 서울역으로부터 55.8km 떨어진 지점이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노상리에 속해 있으며 민간인 통제구역인 남방한계선에서 700m 가량 떨어져 있다. 지난 12일 설에는 처음으로 실향민을 태운 망배열차가 운행돼 도라산역에서 통일경모제가 치러지기도 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지어지는 역사는 지난해 3월 착공돼 현재 막바지 마무리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2002. 02. 20. 도라산역을 방문한 한미정상으로 부시 미 대통령은 “북한이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위협이 아닌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여기서 북쪽으로 14㎞의 철도만 더 이으면 남북한이 육로로 연결된다."고 했다. 20일 오후 2시30분쯤, 남북 경의선 철도 연결공사의 남측 최북단역인 ‘도라산역’을 방문한 한·미(韓美) 정상들은 통일과 미래에 대한 소회(所懷)를 가감없이 피력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첫선을 보인 대통령 전용열차 ‘경복호’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고, 부시 대통령은 비무장지대의 미군기지를 방문한 후 이곳에 왔다. 두 정상은 도라산역 도착 후 ‘서울 56㎞, 평양 205㎞’라는 이정표 아래서 기념촬영을 하고, 비무장지대(DMZ) 철책선에서 불과 50m 떨어진 브리핑 장소로 가 경의선 공사 종합상황실장인 이명훈 1사단 부사단장으로부터 북한군 동향과 공사진척 상황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브리핑 도중 두 정상은 귀엣말을 나누기도 했으며, 김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북쪽 진영에 북한군들이 천막을 다시 치는 등 경의선을 연결하려는 의향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하자, 부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게 되길 바란다(Ok, I hope so)”라고 대답했다. 부시 대통령은 역사(驛舍) 앞에 마련된 경의선 침목에 ‘이 철도선이 한국 가족들을 합쳐주길 기원한다(May This Railroad Unite Korean Families)’라고 서명했다. 이 침목은 철도 박물관에 보관되며, 이를 본 뜬 모형은 훗날 경의선이 연결될 때 남측의 마지막 침목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김 대통령과 부시는 이어 각각 6분과 10분 가량씩 연설했다. 부시는 “나의 비전은 명확하다”면서 “철조망과 공포 속에 분단된 한반도가 아니라 협력과 통상교역을 통해 언젠가는 통일될 한반도를 전망하고 있다”고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면서도,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들이 가장 위험한 무기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날 두 정상의 도라산역 방문에는 우리측에서 정세현(丁世鉉) 통일, 최성홍(崔成泓) 외교,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 등이, 미측에서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이 참석했다. 실향민 등 수백여명이 자리를 함께한 한·미 정상의 도라산역 행사에는 방한 중인 147명의 백악관 출입기자를 포함, 전세계 언론사 기자들이 참석해 취재경쟁을 벌였다.
▶ 임진각 -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에 위치한 임진각은 망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우리나라의 국도가 정비되면서 각종 전적기념비들과 함께 실향민을 위한 공원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2005년 개발완료예정으로 관광지를 조성중이며, 6·25전쟁 유물 및 각종 반공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철마는 달리고싶다(경의선철도 중단점), 북한 실향민을 위한 망배단, 50여년 만에 개방이 되 관광객이 걸어다닐 수 있도록 만든 자유의 다리와 조그만 한반도 모양의 통일연못, 평화의 종, 등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며 통일을 염원하는 안보관광지로 매년 200만 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하고 있다
▶ 망배단 - 조국이 애국선열의 독립투쟁과 제2차 세계대전 8월 15일 일제 36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그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민족의 염원과는 무관하게 강대국의 일방적 결정에 의하여 38선이 그어져 수천년간의 통일국가였던 이 나라가 남북분단의 비운을 맞게 되었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북한공산집단의 박해와 잔학한 만행을 피하여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산천을 떠나 자유를 찾아 남하한 5백만 실향민들은 매년 추석이면 임진각에 임시제단을 설치하고 북녘에 두고 온 부모와 조상에 대한 경모행사를 거행해 오면서 상설제단 설치를 염원해 오던 중 정부에서 총 공사비 5억여원을 들여 (주관: 내무부, 이북5도, 집행: 파주시청) 1986년 9월 26일 북녘 땅이 한눈에 보이는 임진각 내 본관건물 맞은편에 건립하게 된 상설제단으로서, 규모와 형태는 120평의 대지에 제단과 향로가 있고 중앙의 망배탑은 조국통일 향한 간절한 염원과 재이북부조에 대한 명복을 비는 기원의 뜻을 담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7개의 화강석 병풍은 이북5도 및 미수복지 경기, 강원의 고적과 풍물, 산천 등의 특징을 조각하여 실향민들의 망향의 상념을 달래고자 하였음
▶ 자유의 다리 - 자유의 다리(경기도기념물제162호1996.12.24.지정)는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뒷편에 놓인 다리로 1953년에 한국전쟁 포로 12,773 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하였기 때문에 고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의 다리로 명명한 다리이다.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 하행 2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 있었는 데 전쟁 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교각 위에 철교를 복구했고 그 남쪽 끝에 임시 교량을 가설했다. 당시에는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는 6경간으로 이루어진 목조 평교형식으로 길이는 83m, 폭은 4.5∼7m, 높이는 8m 내외이다. 순수한 목구조는 아니고 인장력을 많이 받는 부분에 철재를 병용하여 만든 혼합 구조이다. 통나무가 4개씩 4열로 세워진 교각 위에 사각 받침목과 Ⅰ형 강으로 만든 철제 보가 짜올려지고 그 위에 장선이 놓인 후 나무로 만든 상판이 올려져 마감되었다. 구조적인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수평재와 가새가 많이 사용되었다. 자유의 다리는 임시로 가설한 교량이므로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 통일촌 마을 통일촌 - 대성동마을과 같은 민통선 내의 정착촌이다. 이곳에서는 전역한 군인들과 접경 지역 주민들의 생활모습을 볼 수 있는 안보관광지이다. 통일촌은 판문점에서 약 10km 이내, 서울에서 북쪽으로 약 50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경사도 8% 이내의 완만한 구릉지역이며, 이곳에는 90여 가구에 450여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을 뿐,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 자연상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통일촌은 장단 3백이라 해서 쌀, 콩, 인삼이 매우 유명하다. 그 중 비무장지대 쌀과 천마주는 신경계통에 좋다고 알려져 주문이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곳 장단백목은 우리나라 최초 개량품종인 콩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개성과 불과 1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서 기후와 토질이 개성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여기서 재배하는 인삼을 고려삼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개성인삼을 최상품으로 여기고 있다. 이 고려삼은 100%정부가 수매해서 특정인에게만 판매하고 있다.
▶ 최북단 마을 대성동 - 대한민국 최북단 마을인 대성동. 휴전선 남쪽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흔히 사람들은 '자유의 마을'로 부른다. 북한의 기정동과 마주하고 있는 이 마을은 자유의 다리로부터 약 12.5㎞, 개성으로부터 남으로 약 11.5㎞ 떨 어져 있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속하는 곳이며, 최근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휴전선을 넘어 돌아오기로 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판문점과 불과 1㎞, 군사분계선과 약 4백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자유의 마을 대성동에 사는 이곳 주민들은 유엔사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대성동 민사규정'이 그것이다. 이 규정은 이 마을 거주 요건을 "대성동에 사는 주민은 1년 다섯 번 어길 때는 4개월간 추방을 당하는데 이는 사실상 주민권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논에 나가거나 들어올 때 유엔사 민정반에 신고치 않는 것이 5회가 되거나, 유엔사 소속 군인들에게 덤비거나 폭언하는 등 불순한 행동을 하게 돼도 4개월간 추방령이 떨어진다. 대부분이 쌀농사를 짓고 있어 삶의 터전인 이곳에서 추방령을 받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대성동에는 세금이 없다.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 또 학생들은 학군 제한이 없어 대한민국 어디든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다. 세금이 없어서인지 자동차가 한 집에 2∼3대 꼴이다. 또 남자가 결혼하면 배우자를 마을로 데리고 와 살 수 있으나, 여자는 남편을 데리고 와 살 수 없다. 현재 대성동에는 45가구 2백50여 명정도가 살고 있으며 6명의 학생이 이 마을에 있는 대성동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대성동의 연평균 소득은 약 1억원이상이다. 꽤 괜찮은 수입이다. 제 3땅굴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위치한 제 3땅굴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44Km거리로 1978년 6월 10일 발견하엿는데 북한이 남침용으로 파내려 온 땅굴 중에서 세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 59-13에 있어 판문점으로부터 남방 4Km거리에 있으며,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까지의 거리는 12km 가 된다. 제3땅굴의 규모로는 총 길이 1,635m, 남측쪽 땅굴의 길이 435m, 깊이 73m, 역갱도 300m이고, 역갱도 경사각 14 ∼ 16°, 폭 2M, 높이 2m로 되어있다. 만일 이를 남침전쟁 루트로 이용할 경우 1시간에 중무장 군인 3만 명을 침투키 가능한 규인 것이다.
▶ 돌아오지 않는 다리 - 공동 경비 구역의 남쪽에 위치한 이 다리는 남북을 분단한 군사 분리 경계선이 지나간다. 이 다리를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유엔군 포로가 그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리의 양쪽에 유엔군(남쪽/한국) 병사와 공산군(북쪽/공화국)의 경비소가 있고, 삼엄한 경비에 긴장하게 된다. 이 다리 곁에는, 판문점 일대를 "공동 경비 지역"에서 "남북 분할 경비"로 변경하는 계기가 됐던 "포플러 사건(도끼만행사건-역자 주)의 그루터기"가 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를 잘라내려던 유엔군 병사(미국인)를, 북조선 병사가 손도끼로 해치려 했던 "포플러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판문점 일대가 "공동 경비"에서 "분할 경비"로 바뀌었다. 문제가 됐던 미루나무는 지금은 잘라낸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시) 임진강에서 이은상 임진강 어부들이 강가에서 쫒겨 들어와 철조망 안에서 농사짓는 농부가 되었다. 배를 버리라기에 언덕에 올라 논을 갈지요 질레꽃 가물에 모내기조차 어렵구려 오늘도 옛강이 그리워 철조망 밖을 내다본다오.
▶ 판문점 -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 전쟁의 종결을 위해 1951년 7월 8일 부터 개성에서 시작한 유전 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1951년 10월28일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곳은 원래 널문리라 불리던 곳으로 휴전회담에 참가하는 중공군 대표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회담장소 부근에 있던 주막을 겸한 가게를 한자로 적어 판문점으로 표기한 것에서 비롯되어 판문점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예비 회담이 시작된 이후 2년 19일 동안에 1,076회 회합을 가진 끝에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간에 휴전협정이 정식 조인된 장소이며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 대치하고 있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냉전시대의 유물이 판문점이다 ( 왼쪽 : 구 판문점 ) 판문점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마을로 문산과 개성을 연결하는 1 번 국도상에 있으며 원래 이름 '널문리'가 한문으로 표기된 것이다. 6. 25전쟁 중 정전협정 이 체결된 곳이어서 오랫동안 남북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50km, 개성 동쪽으로 약 8km, 북위 38。선 남쪽 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정전협정 체결 후 UN과 북한측 공동경비구역으로 정해진 전후좌우 경계간 직선거리가800m에 불과한 좁은 공간이다. 여기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해 UN측의 '평화의 집',북측의 '통일각'등 24동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또한 서쪽의 사천에는 민족분단의 상징인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또한 '자유의 집'과 '판문각'에는 남북간에 필요한 연락업무를 위해 쌍방의 적십자사가 상설 연락사무소와 직통전화 2회선을 설치해놓고 있다. 판문점 내 공동경비구역내 군사분계선은 「군사정전위원회」회의실 내에 놓여 있는 장방형 회의용 탁자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마이크선과 이 탁자 위에 놓여있는 유엔기와 북한의 깃발로 상징된다. 도라산都羅山 -이규태 끊어진 임진강 철교의 남쪽 수풀 속에 철마 한 마리가 강 건너 도라산을 바라보고 쓰러져 있었다. 노산 이은상은 이 철마를 보고 이렇게 읊었다. 「철마야 너 왜 입을 다물고 /잡초 속에 쓰러져 누웠느냐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울어 /이 적막한 하늘을 뒤흔들어라 /지금 곧 북으로 북으로 /냅다 한번 달리자꾸나.」 그 철마가 52년 만에 벌떡 일어나 민족의 염원을 싣고 우렁차게 울긴 했는데 겨우 철교를 건너 맞바라보이는 도라산 기슭에 멎고야 말았다. 임진강 건너기가 얼마나 힘겨운가를 도라산은 알고 있다. 임진년 왜란으로 졸지에 피란길 떠났던 선조께서 좌우의 신하들이 도망친 후 굶주린 채 폭우 쏟아지는 밤 이 임진강을 건너야 했다. 내의원 의원 한 분이 상투 속에 숨겨온 비상양식인 엿으로 허기를 달랜 임금은, 배 하나 주워다 탄 것이 비바람에 방황하여 표류하는데 강언덕에 있는 정자에 불을 질러 뱃길을 밝히고야 도강했던 사실을 도라산은 지켜 보았다. 병자년의 호란으로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 따라 조선에 온 명나라 궁녀가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귀환령이 내렸다. 오랑캐 궁전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이 궁녀는 강을 건너며 몇 차례 투신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강을 건너자 신었던 꽃신을 나란히 벗어놓고 강물에 투신했다.이 꽃신으로 도라산 기슭에 무덤을 만들었고 뜻있는 분들은 사신길 가면서 이 꽃신 무덤에 술 한잔 따라 바치고 시를 읊곤 했던 것이다. 어딘가 수풀 속에 남아 있을 이 꽃신 무덤을 오로지 도라산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도라산은 한양과 평양을 잇는 봉수대가 있던 산으로 하필이면 잘린 분단 국토의 허리목에 자리하여 길이 있으면서 가지 못하는 분단을 상징하여 반 세기를 지켜내린 산이다. 이 도라산이 교류의 상징 장소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분단 최북단인 도라산을 방문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도라산이 경의선 단절의 최북단이고 보면 철도 연결로 남북을 한 꿰미에 꿰는 데 전폭적인 지지 표명이요, 바로 한국은 남북대화, 미국은 북·미대화를 촉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도라산 밑자락에 협상의 자리를 깔러 부시가 멍석을 메고 그 곳에 가는 것일 게다. 그리고 도라산 봉수대에 봉화가 타오르는 것을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2002. 2. 18.]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200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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