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06.04)북경

북경졸여(06.4.28-5.1)#18 이화원 1 (4.30오후)

ksn7332 2006. 5. 4. 12:57

북경졸여(06.4.28-5.1)#18 이화원 1 (4.30오후)

<<이화원>>

고전적인 조경 풍치림으로 베이징 시[北京市] 서쪽 교외에 있다. 1153년(金貞元 1) 완안량(完顔亮)이 행궁(行宮)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원대에는 옹산(甕山)과 옹산박(甕山泊)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완서우 산[萬壽山]과 쿤밍 호[昆明湖]이다. 명대에는 이곳에 호산원(好山園)을 조성했으며, 청대인 1764년(乾隆 15)에 개축하여 청의원(淸園)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888년 서태후(西太后)가 군비를 유용해 다시 개수하고 이허위안이란 이름을 붙였다. 1924년 공원으로 바뀐 이후 해마다 약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 총면적은 290㏊이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동북부는 궁전구역으로 런서우뎬[仁壽殿]이나 러서우탕[樂壽堂]과 같은 웅장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풍치구역은 궁전구역 서쪽에 있다. 이름난 경관으로는 전통적인 채색화가 그려져 있는 창랑[長廊:길이 728m] 회랑, 쿤밍 호를 가로지르는 스치쿵차오[十七孔橋] 다리, 그리고 푸른 호수 안에 떠 있는 듯한, 한백옥을 쪼아 만든 돌배 등이 있다. 또한 완서우 산 앞에 우뚝 솟은 매우 화려하게 지어진 포샹거[佛香閣]와 양쯔 강[揚子江] 남부 조경 풍치림의 특성을 풍부하게 살린 셰취위안[諧趣園] 등도 유명하다. 이허위안의 모든 경관 배치에 중국 조경 풍치림 예술의 큰 성과가 집약되어 있다. 이밖에 시산 산[西山]과 위취안 산[玉泉山]은 경관에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이허위안은 중국 조경 풍치림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서태후>>

중국 청(淸)나라 함풍제(咸豊帝:1850~61 재위)의 황후.

효흠(孝欽), 서황후(西皇后),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라고도 한다. 동치제(同治帝:1861~75 재위)의 어머니이자 광서제(光緖帝:1875~1908 재위)의 양어머니로서 청 제국을 거의 반세기 동안 지배했다. 보수파 부패관료 일당을 기반으로 청을 철권통치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강력한 여성 지배자로 꼽히고 있다. 그녀는 함풍제의 서열이 낮은 후궁이었는데 1856년 황제의 유일한 아들 재순(載淳)을 낳았다. 황제가 죽자 당시 6세이던 재순은 동치제로 즉위했고, 국사(國事)는 8명의 원로로 구성된 섭정위원회가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풍제의 정실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東太后)가 교묘한 계략을 세워 결국 섭정을 넘겨받게 되었고, 전 황제의 동생으로서 의정왕(議政王)이 된 공친왕(恭親王)이 두 태후를 보좌했다. 이같은 3인집정(三人執政) 아래 정부는 일시적으로 활기찬 정책을 폈다. 중국 남부를 황폐화시켰던 태평천국운동(1850~64)과 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염군(捻軍)의 난을 차례로 평정했다. 외국어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으며 근대적인 세관을 설치했다. 서양식의 군수공장을 세웠고 외교 담당부서를 최초로 만들었다. 대내적으로도 정부의 부패를 종식시키고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치제가 성년이 된 이후인 1873년 섭정은 끝났지만 서태후는 계속해서 국사를 장악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젊은 황제에게 무절제한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여 황제의 서거를 앞당기게 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군대의 힘을 빌려 제위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3세밖에 되지 않은 조카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겨주었다. 결국 두 태후는 계속해서 섭정을 했지만 1881년 자안황태후가 갑자기 사망하자 서태후는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3년 후 그녀는 공친왕을 제거하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정책의 대부분을 폐기시켰다. 1889년 서태후는 명목상 자신의 권력을 정부에 넘겨주고 은퇴하여, 베이징[北京] 북서쪽에 재건한 호화로운 이허위안[和園]에서 기거했다. 그러나 중국이 청일전쟁(1894~95)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지 3년이 지난 1898년 젊은 광서제가 개혁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를 쇄신·근대화하고 부패를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인 계획을 추진하자, 수구파 관료들이 서태후 주위에 집결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일격을 가했다. 새로운 개혁정책은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황제는 자신의 궁전에 연금되었고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중국이 평화롭게 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무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듬해 서태후는 반외세적(反外勢的) 성격의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을 조장한 관료들을 지원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여 수백 명의 외국인이 살해되었고, 베이징에 주재하던 외국공사관들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외국 연합군이 곧 베이징을 장악함에 따라 서태후는 베이징을 떠나 치욕스러운 강화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광서제는 아직 정부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1902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1898년에 자신이 무산시켰던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기 전날 광서제의 죽음이 공표되었는데, 그녀의 명에 따라 독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태후의 인수전에서(서태후의 상징인 공작을 황제의 상징인 용보다 오른쪽에 배치함)

                                                           곤명호와 만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