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스크랩] 2012 북경 졸업여행(인천대학교 전기공학과) - 결산

ksn7332 2013. 1. 5. 21:01

2012 북경 졸업여행(인천대학교 전기공학과)  김상남 교수

<자세한 사진은  http://cafe.daum.net/ksn7332 - 졸업(수학)여행(1978- )방에 올렸습니다.>new       

 

4학년때는 개개인의 스펙준비 및 취업관계로 스캐줄이 맞질않아 어려움이 예상되어서 졸업여행은 3학년 1학기 때 계획하여 9월중에 실행하려 하였으나 2학기 개강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9월을 보내고 10월 중간고사 후 10월 31일(수)-11월 3일(토)까지 실시하였읍니다.

<10월31일(수)-첫째날>

여행사(하나투어)의 집합시간은 10시 30분이었으나 첫 해외 나들이가 많은 구성원들이므로 30분 여유를 주어 10시까지 인천공항 3층 M카운터에 집합하여 하나투어 여행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항공기 티켓을 받아 개인짐을 붙이고 출국심사(여권 확인)를 필하고 보안검사(몸수색 및 소지품 검사)후 면세점을 경유하여 지하철을 이용하여 제2청사(외국 항공사)로 이동하여 108게이트에서 연결편 관계로 30여분 지연된 시간에 인천공항을 이륙하였읍니다.

중국국제항공(CA)사 항공기는 보잉기종으로 300여명 중 한국관광객들이 주축을 이루는 듯하였으며, 중국어, 영어, 한국어의 안내방송이 있었고, 스튜어디어스는 중국인이 많았고 한국어를 구사하는 여승무원도 있었으며, 기내식은 닭고기와 소고기 식사가 제공되었으나, 일행들의 입맛에는 별로인듯하였고, 커피 등 음료 및 주류의 제공도 있었으며, 단체 입국객들에게는 중국입국류서 제출이 면제가 되었고, 좌석의 영상 및 음향서비스는 중국어, 영어, 불어만 제공되었다.

공항을 출발하여 기내식 제공과 함께 2시간을 날아서 북경수도공항에 도착하여 단체비자인 관계로 15명, 14명이 순서대로 중국 입국수속을 필한 후 짐을 찾아 나와서 훈춘출신이라는 조선족 "염소봉" 가이드와 만나서 인사 후 버스에 짐을 싣고 버스편으로 "왕부정거리"를 관람한 후 시내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저녁식사 후 "베이징 천지서커스"를 관람하고 9시경에 숙소인 "성월갈마주점(StarMoon Hotel)" 3027호실에 짐을 풀었다. 호텔은 2인 1실로 괜찮은 편이었으나, 중국인 특유의 불편한 흡연 문화관계로 4성급 호텔이지만 복도에서도 담배 냄새 때문에 어려움이 많아서 문화국가가 되기에는 요원한듯 하였고, 가져갔던 노트북은 호텔방에 유선코드가 있어서 호텔 비밀번호로 사용을 하였으나 느리고, 다운 또는 업로드시는 시스템이 멈춰버리는 경우가 많았읍니다.

<11월 1일(목)-둘째날>

아침 6시 30분에 모닝콜 후 호텔 지하 구내식당에서 호텔식으로 식사 후 8시에 버스를 출발하여 1시간 30분여를 달려서 팔달영 "만리장성"을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관람에 들어 갔으며, 만리장성 관광은 걸어서 약3시간 관광하는 코스와 "팔달영"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관람하는 코스가 있는데, 우리 일행은 후자를 선택하여 쉽게 만리장성에 올랐읍니다. "모택동" 주석께서 "장성을 올라보지 못한 사람은 대장부가 못된다"는 어록때문인지 중국 현지인들이 입추에 여지 없이 많아서 약간 후미진 곳에서 단체 및 개인 사진을 찍고 뿌옇게 보이는 멀리의 장성을 관망하고 내려왔읍니다.

(만리장성 - 萬里長城)

不到長城非好漢(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진의 강력한 통일제국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이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팔달령"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만리장성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간으로 대부분의 만리장성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015미터이며, 산세가 험준한 편이다. 장성 위에서 구불구불 기복이 심한 산세를 따라 멀리까지 뻗어있는 견고한 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장성은 20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길이가 5천만m에 이른다. 장성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시베리아의 혹한으로 더 이상 북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오늘날 말하는 서쪽 감숙성의 가욕관(嘉浴館)에서 시작하여 요녕성 압록강변에 이르는 635만m 길이의 성벽은 대부분 명나라때 지어진 것들이며, 만리장성에 설치되어 있는 가드레일과 케이블카는 좀 더 편하고 색다른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제는 흘러간 역사의 자취가 된 장성은 세계 7대 건축물,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세계적인 유적지이다.또 만리장성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돌아오는 길에 쇼핑센터 겸 점심식사를 하고 청나라시절에 황제들의 여름별장이며, 서태후가 많이 이용했다는 "이화원"에 들어섰다.

이화원은 평지인 북경에서 땅을 파서 호수(곤명호)를 만들고 파낸 흙으로 산(금수산)을 만들었다는 그 시대에 원성을 많이 삿다고 하지만 이 시대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큰 자산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서태후가 거닐었다는 세계최대의 회랑(복도)과 호수 등을 관람한 후 중국여행 중 감초라고하는 "발맛사지"를 하고 저녁식사 후 "금면왕조"관람 후 세기천계를 둘러보고 밤9시경에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이화원 - Summer Palace and Imperial Garden in Beijing)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다. 특히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더 유명하다. 북경 서쪽 외곽인 해정구(海淀區 : 하이디엔취)에 위치해 있으며, 북경 시내에서는 15㎞ 떨어져 있다.이화원의 전신은 북경 청의원으로, 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웠을 때 함께 파괴되었다.
그러다가 광서 14년(1888)에 서태후는 해군 군비를 이용해서 다시 재건했으며 이 때 이름을 현재의 "이화원"으로 바꿨다. 1900년, 이화원은 또다시 팔국 연합군의 선공을 당했다. 서태후는 서안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에 다시 거대한 자금을 들여 복구에 나섰다. 이화원은 무엇보다도 규모가 실로 엄청나며 총면적이 294㎡이다. 본래 평지였던 곳을 파내 만든 곤명호(昆明湖)와 호수에서 파낸 흙으로 쌓은 만수산(萬壽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수면이 전체의 3/4을 차지한다. 서태후가 이화원에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둔 목적은 피서와 요양이였으며, 190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서태후는 이 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 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화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곤명호는 인공호수이지만, 인공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곤명호 동쪽 기슭에 잇는 17 공교의 난간에 새겨져 있는 544마리의 사자도 볼 만하다. 또한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은 역시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이화원의 주요 명소들로는 정문인 동궁문(東宮門)을 비롯해, 덕화원(德和園),장랑(長廊),불향각(佛香閣) 등이 있다. 동궁문은 이화원의 정문으로 삼명양암(三明兩暗)의 무전식 건축양식이 사용되었으며, 덕화원에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경극극장이 위치하고 있다. 높이 21미터에 상,중,하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랑은 동쪽으로는 요월문(邀月門)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석장정(石丈亭)까지 전체길이 728미터에 총 273칸의 화랑으로 이어진 복도 건축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길며, 유명한 장랑(긴복도)이다.
마지막으로 불향각은 만수산 앞의 산비탈길에 세워진 높이 21미터의 거석 위에 세워진 전각으로 남쪽으로는 곤명호를 향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지혜해불전(智慧海佛殿)을 기대고 있다. 이화원의 상징적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11월 2일(금)-셋째날>

아침 6시 30분에 모닝콜 후 호텔 지하 구내식당에서 호텔식으로 식사 후 8시에 버스를 출발하여 "시내관광을 걸어서 발로한다"는 "발광"에 들어갔으며,북경의 옛 상업거리를 재현했다는 전문대가를 둘러보고, 천안문광장에 들어섰읍니다.

천안문광장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통치자가 죽으면 시신을 방부제처 리하여 인민들이 관람하는 제도를 체택하므로(베트남, 북한 등) 천안문광장에는 빨간모자를 쓴 그룹, 파란모자를 쓴 그룹 등등 단체 손님들이 입추에 여지 없이 줄을 서 있어서 오늘의 발광이 힘들겠구나 하였으나, 외국관광객들은 그 군중들을 우회하여 100만명의 관중들을 운집시킬수 있다는 "천안문광장에서 단체 인증사진을 찍은 후 자금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천안문광장 - 天安門廣場)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 중국사람들의 드넓은 기개를 대표하는 명소다.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고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전체 면적이 44만㎡이며, 동시에 백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 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여러개의 인상깊은 건축물들이 주변에 들어서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동쪽은 중국 국가박물관, 서쪽은 인민 대회당, 그리고 남쪽에는 모택동 기념당이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중국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천안문 광장은 옛부터 대규모 군중시위, 집회, 행렬, 경축 행사 등이 이어졌다.
천안문 광장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1989년 4월 중국 전총서기이자 개혁가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이 운동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이 되어 서로 손을 맞잡고 천안문 광장으로 점차 운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를 느낀 당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登小平)은 이들을 진압할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결국은 같은 해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있던 학생과 시민들을 기관총 난사와 전차 동원 등의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 진압함으로서 사건을 마무리시켰다.
이후부터 천안문 광장은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천안문광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는 해가 뜨는 새벽에 거행되는 국기 게양식이다. 행진곡과 함께 군인들이 정렬하여 나타나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는데, 이 의식에 걸리는 시간만 거의 30분 정도 소요된다.
국기 게양시간과 강하 시간은 매번 조금씩 다른데 그 이유는 넓은 중국 대륙에서 해가 뜨고 지는 자리와 천안문 광장의 지평선이 서로 일치할 때를 계산하여 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양식이 거행될 때에는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지나갈 수 없고 대신,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는 것은 괜찮다.
해가 어슴프레 뜨는 새벽의 오묘한 기운 속에서 벌어지는 이 작지만 웅장한 의식은 외국 관광객들 뿐 아니라 북경을 방문한 타지역의 중국인들에게 북경에 오면 꼭 놓치지 말아야 할 필수 코스이다

자금성은 9,999칸의 방을 가졌다는 세계최대의 궁전으로 황제나 황후가 기거하는 지역에는 자객의 침입등의 문제로 나무를 심지 않았으며, 난간, 계단등을 옥을 재료로 사용하여 문화재가치가 더욱 빛났다.

자금성(紫禁城 - Imperial Palace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북경시의 중심에 위치한 명·청대의 황궁으로, 천안문 정문으로 들어가 울창한 가로수 길을 따라 단문과 오문을 지나 보이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고궁(故宮)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의 궁전은 천제가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 구역(禁地)이다"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전체 면적은 72만㎡이며, 총 9999개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궁전 건축물이다.
1406∼1420년에 건조된 이래로 5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냈고, 현재는 105만점의 희귀하고 진귀한 문물이 전시·소장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자금성은 외조와 내정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문과 태화문을 지나면 흔히 '3전'이라 부르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나타난다. 3전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금성의 내정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는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 등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동육궁과 서육궁이 자리잡고 있다.
방어의 목적으로 궁전 밖에는 10m 높이의 담이 있는데, 사방에는 성루가 있고 밖에는 넓이 52미터, 깊이 6미터의 호성강(護城河)이 흐른다. 4면의 담에는 각기 문 하나씩이 나있는데 남쪽에 오문(午門), 북쪽에 신무문(神武門), 동쪽에 동화문(東華門), 서쪽에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1988년 개봉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꼼꼼하게 관광을 하는 데에는 하루가 꼬박 걸리고 그냥 가로질러 가는 데에만도 2시간 정도가 걸릴 만큼 넓은 곳이다.
요즘에는 세계적인 문화공연도 종종 열려 문화유적지나 관광지로서 뿐 아니라 중국시민의 휴식장소, 문화장소로서도 이용되고 있다. 1987년에 이르러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자금성을 관람하고 자금성 후문 인근에서 인력거 투어 후 점심식사(한식)를 하거 "부국아쿠아 월드"관람 후 2008년 북경올림픽 경기장을 둘러보고 코리아타운 근처의 "유상"음식점에서 저녁(샤브샤브)후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11월 3일(토)-넷째날>

아침 6시 00분에 모닝콜 후 호텔 지하 구내식당에서 호텔식으로 식사 후 7시 30분에 버스를 출발하여 북경 수도공항으로 가면서 염소봉 가이드와 3박4일의 석별의 정을 나누고 8시 30분경에 공항에 도착하여 까타로운 출국수속(나이타 절대금지 등)을 거쳐서 단체비자인 관계로 14-15명씩 줄을 서서 출국수속과 보안검열 통과 후 10시 30분에 E04 게이트를 거쳐서 탑승후 11시 정각에 CA131 편으로 수도공항을 출발하여 기류변동으로 흔들거리는 항공기를 이용하여 기내식 후 오후2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후기>

우리 학생들에게 중국의 수도인 북경(베이징)을 관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드립니다. 졸업여행이라 하면 문화탐방과 휴양지라는 목적으로 대별되는데, 그래도 학생들에게는 문화탐방이 유익할 듯하여 파타야나 푸켓등지 보다는 북경을 권했고 본인은 여러차례 중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져서 큰 설레임은 없었으나, 발전 변화의 속도가 빠름에 놀라움은 많았으며, 중국인들은 3가지를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즉 (1)땅이 너무 넓어서 다 구경을 못하고, (2)한자가 어렵고 많아서 글자를 다 알지 못하고, (3)음식의 종류가 많아서 모든 음식을 먹어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며, 또한 음식의 종류가 많아서 3가지(육지의 책상다리, 바다의 배, 하늘을 날으는 것 중 비행기)를 빼고는 모든 것을 먹는 다고한다.

북경의 상징인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구경한 우리 학생들은 이번 기회를 계기로 세계속에서 큰 뜻을 펼쳐서 세계속에서 우뚝서기를 바랍니다.

                            2012년 11월 5일

                           인천대학교 전기공학과 김상남 교수  

 

 <인천공항>

 <인천공항 면새점>

 <인천공항 108Gate>

 <북경의 왕부정 거리>

 <북경 팔달영 만리장성>

 

 

 

 <북경 이화원>

 <금면왕조>

<세기천개>

 <북경 전문대가>

 <천안문광장>

 

 <자금성>

 

 <부국해저월드>

 

 

 

 

 <북경 올림픽경기장>

 

 

<올림픽 경기장 건너편 칠성호텔'판구다관(盤古大觀)'>

 <북경 수도공항>

 

 

하늘에서 본 영흥대교

 

출처 : 김상남 교수 카페
글쓴이 : SN.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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